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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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공업전습소 |
한글표제 | 공업전습소 |
한자표제 | 工業傳習所 |
관련어 |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중앙시험소(中央試驗所) 부설(附設)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경성공업전문학교(京城工業專門學校)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대한제국기 |
왕대 | 대한제국기 |
집필자 | 조재곤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
1907년(융희 1) 대한제국 정부가 서울에 설립한 공업교육기관.
개설
공업전습소는 ‘수공업에 관한 기술의 실지 전습을 행하고’, ‘조선 재래의 기술을 부흥하는 데 주안을 두는’ 관립 간이공업교육기관으로 세워졌다. 이를 통해 통감부는 공업 원료가 될 한국 농산물의 개선 증진을 꾀하는 한편 간단하고 편리한 공업기술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공업전습소의 설립 목적은 종래 거액의 예산으로 일본에 파견하던 조선의 관비유학생의 수를 줄이고 대신 실기에 능한 사람들을 2~3년 동안 양성하여 실제 업무에 종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우선 담당부서를 학부에서 산업을 주관하는 농상공부로 이관하기로 하였다. 또 다른 중요한 설립 목적은 한국인들을 일제 지배체제로 갈등 없이 편입시켜 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업원료의 시험분석, 일본 공산품의 생산과 소비, 직공 양성 등을 통해 일본 기업이 한국으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기반을 사전에 다지려는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1907년(광무 11) 설립된 공업전습소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일제의 공업정책 수립에 필요한 조사 및 시험에 관한 일로 한국 가내공업의 전반적 실태를 조사하고 그 생산품들을 대상으로 각종 시험을 실행함으로써 정책수립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면직물을 비롯한 제지, 도자기, 견직물, 금속품 등 당시 한국에서 비교적 널리 제조되고 있던 공업 분야 전반을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전습소 내의 각종 실습장에서 재학생 실습이나 졸업생의 고용을 통해 다수의 개량 공산품을 생산하여 한국인 공업자영자 혹은 일본인 공업가들에게 시범적인 실습공장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공업전습소의 설비나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실습 작업을 관람할 수 있게 하고 매년 두 차례에 걸쳐 제작품 진열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공업전습소에 설치된 학과는 염직, 도기, 금공, 목공, 응용화학, 토목 등 6개 과이고, 2년 연한으로, 입학생은 만 15세 이상 25세 이하의 남자 중 경력과 학력을 보아 선발하였다. 학과목은 공통과목으로 물리, 화학, 수학, 도화, 일본어, 간이영어 등이었다. 1907년 실시된 제1회 입학시험에 지원자들은 관립 고등소학교 출신 15명, 관공립 소학교 출신 9명, 나머지는 사립학교 및 각종 학교 출신이었다. 지원율이 가장 높은 학과는 염직과였고, 다음으로는 금공과와 응용화학과였다. 시험과목은 일본어, 한문, 산술, 구두시험 등이었다.
서울에 공업전습소가 설립되자 이후 지방에도 자영 수공인력을 대대적으로 양성할 목적으로 최소한의 기술실습만을 속성으로 강습시키는 공업전습소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전습 기관은 1908년 4개, 1909년 6개, 1910년 9개였는데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인 1911년에는 100여 개로 급증하였다. 특히 일제가 기업전습을 장려하였기에 전습소 중에는 절반 이상이 기업전습 기관이었고 지역적으로는 전남, 경남 지역에 대거 설치되었다.
주요 전습소의 경우 교육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대개 일본인 교사와 전습소 출신의 한국인 조수가 6개월 정도의 기간 동안 10~2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전습 중에는 수당을 지급하고 수료하면 필요한 기구와 부속품, 약간의 지원금을 제공하고 아울러 원료 및 생산물 등을 공동으로 구입하거나 판매하도록 유도하였다. 이후 이들 기관은 주요 생산지를 중심으로 통폐합을 거쳐 1915년에는 그 수가 27개로 크게 줄어든 대신 규모 면에서는 보다 커지는 양상을 나타냈다.
변천
관립 공업전습소는 1910년 강제병합 이후부터 조선총독부공업전습소로 불리다가 1912년 중앙시험소 부설 공업전습소로 바뀌었다. 초대 소장은 전 군마현공업시험장장(群馬縣工業試驗場長)노다 타타구라[野田忠藏], 2대 소장은 사무관 이토 사부로[伊藤三郞], 3대 소장은 농학박사 도요나가 마리[豊永眞里]가 부임하였다. 직원들은 한 과에 4~5명으로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한국인은 대개 실습담당 및 학생관리자로 각 과에 1명씩 배치되었다. 초기 한국인 직원으로 농상공학교 기사안형중 등이 있었으나 이들의 재직 기간은 몇 개월씩에 불과하였다.
본과뿐 아니라 1908년부터는 수업연한 1년 과정의 전공과를 설치하여 본과 졸업생 중 일부를 입학시켰다. 1910년 무렵에는 특정 부문의 실기만을 가르치는 수업연한 1년의 실과를 증설하였다.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 설립과 함께 그 부속기관으로 이관되면서 전습보다는 교육에 중점을 두었고, 곧이어 수업연한 3년의 을종공업학교로 승격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김근배, 「대한제국기~일제 초 官立工業傳習所의 설립과 운영」, 『한국문화』18,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