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염무(顧炎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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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청초 시기의 사상가.

개설

고염무는 소주부(蘇州府) 곤산현(昆山縣)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학문을 익히며 자랐다. 명조의 관료가 되기 위하여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명조가 멸망한 뒤 출사하지 않았다.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풍을 주장하며 청대 고증학(考證學)의 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활동 사항

고염무는 남직예(南直隸) 소주부 곤산현에서 고동응(顧同應)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염무의 본래 이름은 고강(顧絳)이었으나, 명 왕조가 멸망한 뒤 고염무로 개칭하였다. 큰아버지의 사촌[堂伯]이었던 고동길(顧同吉)이 죽자 가계를 잇기 위하여 당백의 아버지[繼祖父] 고소불(顧紹芾)의 양손자로 입적되었다. 고동길(顧同吉)과 정혼하였던 왕씨(王氏)에게 여섯 살 때부터 학문을 배웠다.

지역의 세족이던 고씨 집안은 대대로 벼슬하다가 가세가 몰락한 상황이었다. 고염무도 14세에 제생(諸生) 자격을 취득한 이후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1643년에는 국자감(國子監) 감생(監生)이 되었다. 청나라의 입관 이후 곤산현령(昆山縣令)양영언(楊永言)의 천거로 남명(南明)의 조정에서 병부사무(兵部司務)를 맡아 『군제론(軍制論)』·『형세론(形勢論)』·『전공론(田功論)』·『전법론(錢法論)』 등을 저술하였다. 계모 왕씨와 함께 반청운동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계모 왕씨는 고염무에게 청 왕조에 종사하지 말 것을 유언하고 자살하여 평생 관료로 출사하지 않았다.

그는 10여 년 동안 하북성(河北省)·강소성(江蘇省)·산동성(山東省)·산서성(山西省)을 여행하며 산천·풍속 및 역사상 흥망의 자취를 고증하는 금석문에서부터 지리·경제·천문·병농·제도 등을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섬서성(陝西省) 화음(華陰)에 거하였다. 1671년 명사(明史) 찬수 참여를 제의받았고, 1678년 청조가 명조에 충성한 지식인을 회유하기 위하여 개설한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통한 천거를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682년 70세의 나이로 산서성 곡옥(曲沃)에서 죽었다. 그는 왕부지(王夫之)·황종희(黃宗羲)와 함께 명나라의 삼대 유로(遺老), 즉 멸망한 왕조의 신하로 칭송받았다.

학문과 사상

고염무는 명조의 멸망 원인이 신유가(新儒家) 때문이라고 보고 관념적인 송·명대의 이학(理學)과 형이상학적인 양명학(陽明學) 모두를 비판하였다. 그는 직관과 자기수양을 강조하는 양명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와 경전에 대한 경직된 해석이 결국 지식인의 사고를 고정적인 틀에 묶어 정치적 현실을 직시할 능력과 이민족의 침략을 막을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군자가 학문을 하는 목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공맹지도(孔孟之道)를 밝히고 다른 사람의 마을을 깨닫게 하는 데 있으며, 역사를 통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진 까닭을 찾아내서 해결책을 강구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논리로 사회에 실제 필요한 경세치용을 주장하였고, 방법론으로 고증학을 정립하였다.

박학을 추구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는 물론 음운(音韻)과 문자(文字), 금석고고(金石考古), 군읍장고(郡邑掌故), 예의풍속(禮儀風俗) 등에 대해서도 정밀히 연구하였다. 경학에서는 한학(漢學)을 연구하고, 음운학에서는 고운(古韻)을 분석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공허한 이론을 거부하고 구체적인 역사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가 30년에 걸쳐 저술하고 사후인 1695년에 출판된 『일지록(日知錄)』에서는 경학·정치·풍속·예의·제도·과학·문학 등 1,000여 가지의 현실 문제들을 언급하였다.

『일지록』은 18세기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이규경(李圭景)·이덕무(李德懋)·정약용(丁若鏞)·성해응(成海應) 등은 고염무의 명나라에 대한 지조, 박학 고증적이고 경세적인 학문 태도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으며, 많은 부분을 배우고자 노력하였다. 정약용은 정조에게 올리는 상소에서 “어린 시절 가졌던 서학 및 잡학에 대하여 가졌던 헛된 관심”을 자책하며, 고염무 등 명말 청초 시기의 학자가 일찍이 깨달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21년 6월 21일).

저술 및 작품

『음학오서(音學五書)』·『일지록(日知錄)』·『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

참고문헌

  • 벤저민 엘먼(Benjamin A. Elman) 지음, 양휘웅 옮김,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예문서원, 2004.
  •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편, 『강좌 중국사 4: 제국질서의 완성』, 지식산업사, 1989.
  • 임계순, 『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신서원, 2000.
  • 손혜리, 「조선 후기 문인들의 고염무에 대한 인식과 수용-연경재 성해응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 73, 2011.
  • 심경호, 「조선후기 지식인과 고염무」, 『한문학보』 1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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