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대전(經國大典)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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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국대전 |
한글표제 | 경국대전 |
한자표제 | 經國大典 |
분야 | 법전 |
유형 | 문헌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 |
집필자 | 성낙수 |
저편자 | 최항(崔恒)ㆍ김국광(金國光)ㆍ한계희(韓繼禧)ㆍ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ㆍ임원준(任元濬)ㆍ홍응(洪應)ㆍ성임(成任)ㆍ서거정(徐居正) 등 |
간행처 | |
간행년일 | 1474 |
권책수 | 6권 4책 |
소장처 | 북촌박물관, 규장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국대전(經國大典) |
조선 초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원전(原典)과 속전(續典), 이후의 법령을 종합하여 만든 조선시대 두 번째 통일 법전.
개설
이 책은 세조가 편찬 작업을 시작했고, 1485년 성종에 이르러 반포, 시행하게 된 법전으로서, 오늘날의 헌법과 비슷하다. 조선의 모든 법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경국대전』은 6조 체계에 맞춰 이전(吏典)ㆍ호전(戶典)ㆍ예전(禮典)ㆍ병전(兵典)ㆍ형전(刑典)ㆍ공전(工典)의 6전으로 되어있고, 각조가 담당할 분야를 법으로 만들었다. 즉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을 세분화한 것으로 이 법전은 조선이 쇠퇴할 때가지 적용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조선은 개창과 더불어, 법전의 편찬에 착수하여, 고려 말 이래의 각종 법령 및 판례법과 관습법을 수집하여, 1397년(태조 6)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제정, 시행하였다. 그 전에 왕조 수립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한 정도전(鄭道傳)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어 바친 일이 있었지만, 개인의 견해에 그친 것이었다. 『경제육전』은 바로 수정되기 시작하여, 태종 때에 『속육전(續六典)』이 만들어지고, 세종 때에도 법전의 보완작업이 계속되지만, 미비하거나 현실과 모순된 것들이 많았다. 국가체제가 더욱 정비되어 감에 따라 조직적이고, 통일된 법전을 만들 필요가 커졌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의 모든 법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 후대에 길이 전할 법전을 만들기 위해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최항(崔恒)ㆍ김국광(金國光)ㆍ한계희(韓繼禧)ㆍ노사신(盧思愼)ㆍ강희맹(姜希孟)ㆍ임원준(任元濬)ㆍ홍응(洪應)ㆍ성임(成任)ㆍ서거정(徐居正) 등에게 명하여 편찬 작업을 시작하게 하였다. 1460년(세조 6) 먼저 호전(戶典)이 완성되고, 1466년(세조 12)에는 편찬이 완성되었으나, 보완을 계속하느라, 전체적인 시행은 미루어졌다. 예종 때에 2차 작업이 끝났지만, 예종의 죽음으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성종 때 수정을 계속하여, 1471년(성종 2) 시행하기로 한 3차, 1474년(성종 5) 시행하기로 한 4차에 걸쳐 『경국대전』이 만들어졌다. 1481년(성종 12)에는 다시 감교청(勘校廳)을 설치하고, 많은 내용을 수정하여, 5차 『경국대전』을 완성하였고,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하여, 1485년(성종 16)부터 시행하였다.
그 뒤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법령이 계속 마련되어 1492년의 『대전집록(大典輯錄)』, 1555년(명종 10)의 『경국대전주해』, 1698년(숙종 24)의 『수교집록(受敎輯錄)』 등으로 보완하였다. 1706년(숙종 32)의 『전록통고(典錄通考)』는 위의 법령집을 『경국대전』의 조문과 함께 묶은 것이다. 또한 반포 때에 이미 예전(禮典)의 의식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따르고, 호전(戶典)의 세입과 세출은, 그 대장인 공안(貢案)과 횡간(橫看)에 의거하도록 규정되었다. 또 형법으로서 『대명률(大明律)』과 같은 중국법이 형전(刑典)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용되었다. 시기가 많이 지남에 따라, 후속 법전도 마련되었다. 1746년(영조 22)에는 각종 법령 중 영구히 시행할 필요가 있는 법령만을 골라, 『속대전』을 편찬하여 시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법전이 나타났고, 1785년(정조 9)에는 『경국대전』과 『속대전』 및 『속대전』 이후의 법령을 합하여, 하나의 법전으로 만든 『대전통편』이 시행되었으며, 그 이후의 법령을 추가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이 조선왕조 최후의 법전으로서, 1865년(고종 2)에 만들어졌다.
서지 사항
6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판본이다. 세로 30.8cm, 가로 20.3cm이며, 현재 북촌박물관,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경제육전』과 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ㆍ호전ㆍ예전ㆍ병전ㆍ형전ㆍ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다. 또 각 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해 규정하고, 조문도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 일반화되어 있어, 건국 후 90여 년에 걸쳐 연마된 훌륭한 법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면ㆍ사령(辭令) 등에 관한 사항이 규정되어 있다.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적제도ㆍ조세제도ㆍ녹봉ㆍ통화ㆍ부채ㆍ상업과 잡업ㆍ창고와 환곡(還穀)ㆍ조운(漕運)ㆍ어장(漁場)ㆍ염장(鹽場)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토지ㆍ가옥ㆍ노비ㆍ우마의 매매와 오늘날의 등기제도에 해당하는 입안(立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의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ㆍ무과ㆍ잡과 등의 과거와 관리의 의장(儀章) 및 외교ㆍ제례ㆍ상장(喪葬)ㆍ묘지ㆍ관인(官印), 그리고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 상복 제도ㆍ봉사(奉祀)ㆍ입후(立後)ㆍ혼인 등 친족법 규범이 수록되어 있다.
‘병전’에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이, ‘형전’에는 형벌ㆍ재판ㆍ공노비ㆍ사노비에 관한 규정과 재산 상속법에 관한 규정이, ‘공전’에는 도로ㆍ교량ㆍ도량형ㆍ식산(殖産)에 관한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의 법사상인 양법미의(良法美意)에 대한 자신감과 실천 의지가 표명되어 있으며, 정치의 요체는 법치(法治)에 있다고 서약, 선언한 창업주인 태조의 강력한 법치 의지가 계승, 발전된 조종성헌(祖宗成憲)으로서, 법제사상 최대의 업적이다.
의의와 평가
이 대전의 편찬, 시행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의 필연적 요청으로서,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라 할 수 있는 통치규범 체계가 확립되었다.
둘째, 여말선초의 살아 있는 현행 법령으로서, 타당성과 실효성이 있는 고유법(固有法)을 성문화하여, 급작스럽고 무제한적으로 침투해오는 중국법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또 영구불변적인 성격이 부여되어, 고유법을 유지하고 계승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전형적인 예가 ‘형전’의 사천조(私賤條)에 규정된 자녀균분상속법(子女均分相續法), ‘호전’의 매매한조(買賣限條)에 규정된 토지ㆍ가옥ㆍ노비ㆍ우마의 매매에 관한 규정과 전택조(田宅條)에 규정된 토지ㆍ가옥 등에 대한 사유권의 절대적 보호에 관한 규정, 사유권이 침해된 경우 민사적 소송 절차에 관한 ‘형전’의 규정들이다. 이 규정들은 특히 중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법이었다.
셋째, 특히 ‘형전’의 규정은 형벌법의 일반법으로서 계수된 『대명률(大明律)』에 대한 특별형사법이었다. ‘형전’의 규정에는 조선의 특수한 형법사상이 담겨 있어 『대명률』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이 대전이 시행된 후 『대전속록(大典續錄)』ㆍ『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ㆍ『수교집록(受敎輯錄)』 등과 같은 법령집과 『속대전(續大典)』ㆍ『대전통편(大典通編)』ㆍ『대전회통(大典會通)』 등과 같은 법전이 편찬ㆍ시행되어, 이 조문이 실제로 개정되거나, 폐지된 것이 적지 않았다.
이 법전은 당시 사회의 한계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국왕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이 한 예이다. 실제 정치운영에서는 점점 세밀한 규정들을 수립하여, 국왕의 권한에 많은 제약을 가하였지만, 조선 사회의 기본 정치이념에서 국왕은 법률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리의 자격에 대해 ‘천민이 아닐 것’ 이상의 신분적 제약을 정해놓지 않아, 중세 신분제의 극복과정에서 한층 발전된 수준을 보여주지만, 노비에 대한 규정을 ‘형전’에 자세하게 담은 것은 당시의 지배층이 노비제의 기반 위에 서 있었고 그들을 죄인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사회운영의 질서는 실질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고, 따라서 법전의 시행 내용도 매우 큰 폭으로 변화해 갔다. 그것은 단순한 법질서의 혼란이 아니라, 사회변동과 발전에 대한 체제의 적응과 노력이었다. 예를 들어 최고위 관서로 의정부가 있고, 그곳의 3정승이 관료의 정상을 이룬다는 기본구조는 19세기 말까지 변화가 없었지만, 조선 전기 3정승과 의정부가 비교적 강력하게 백관을 통솔하고 국정을 총괄한 반면, 조선 중기 이후로는 비변사(備邊司)가 국정을 총괄하는 관서가 되었고, 3정승이 그곳의 대표자로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 때의 비변사는 고위관리의 회의를 통해 운영되는 합좌기구로서 당시 지배층의 확산에 조응하여, 좀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끌어 모으고, 더욱 복잡해진 국가행정을 전문적으로 이끌어간다는 의미를 지녔다. 물론 후기 법전인 『속대전』부터는 비변사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다.
참고문헌
- 박준호, 「『경국대전』 체제의 문서 행정 연구」, 『고문서연구』제28집 , 한국고문서학회, 2006.
- 박현모, 「‘왕조’에서 ‘제국’으로의 전환 : ‘경국대전체제’의 해체와 대한제국 출범의 정치사적 의미 연구」, 『한국정치연구』 제18집 제2호, 서울대학교 정치학연구소, 2009.
- 오기수, 「『경국대전』 호전에 규정된 세종대왕의 공법에 관한 연구」『세무학연구』 제28권 제3호, 한국세무학회, 2011.
- 이은용, 「『경국대전』을 통해 본 하곡 정제두의 경제관」, 『양명학』 통권 제27호, 한국양명학회, 2010.
- 장동우, 「『경국대전』 「예전」과 『국조오례의』「흉례」에 반영된 종법 이해의 특징에 관한 고찰」, 『한국사상사학』 제20집, 한국사상사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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