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창막부(鎌倉幕府)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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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겸창막부 |
한글표제 | 겸창막부 |
한자표제 | 鎌倉幕府 |
상위어 | 무가정치(武家政治) |
하위어 |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장군(將軍), 어가인(御家人), 수호(守護) |
동의어 | 가마쿠라 바쿠후 |
관련어 | 실정막부(室町幕府) |
분야 | 정치/외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일본 |
집필자 | 백옥경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겸창막부(鎌倉幕府) |
12세기 말 원뢰조(源賴朝,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겸창(鎌倉)을 거점으로 하여 창시한 무가정권.
개설
겸창막부(鎌倉幕府, [가마쿠라 바쿠후])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시소(侍所, [사무라이도코로]), 공문소(公文所, [구몬조]), 문주소(問注所, [몬추조]) 등 독자적인 지배 조직을 갖춘 일종의 군사정권으로서, 1185년부터 1333년까지 존속하였다.
변천
1. 막부의 성립
겸창막부를 세운 원뢰조는 헤이안시대 말기 가와치 겐지[源氏]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원뢰조와 함께 싸운 평치(平治, [헤이지])의 난에서 다이라 가문에 패하여 이두(伊豆)로 유배되었다. 1180년 원뢰조는 이즈에서 이인(以仁, [모치히토]) 왕(王)의 명을 받들어 다이라씨 타도라는 기치를 내걸고 군대를 일으켰다.
그는 동부 일본의 무사단을 포섭하여 전력을 강화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아 관동 지방을 제압하고 겸창에 본거지를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동생들과 힘을 모아 원의중(源義仲,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과 평가정권(平家政權)을 무너뜨렸으며, 전공이 뛰어났던 막내 동생 원의경(源義経,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을 추방해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원뢰조(源賴朝)는 전국적으로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해 천황 아래서 막부가 국가적 군사 경찰 기능을 담당하는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1192년에원뢰조(源賴朝)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전국에 있는 무사들의 총대장 지위에 오르게 되면서 막부는 명실상부한 권력의 기구가 되었다.
겸창막부는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주종 관계를 근간으로 하였다. 그것은 장군(將軍, [쇼군])과 어가인(御家人, [고케닌])이 어은(御恩, [고온])과 봉공(奉公, [호코])이라는 관계를 맺고, 어가인이 충성 서약을 하면 장군은 그들을 보호할 의무를 지는 것이었다. 또한 장군은 어가인이 조상 때부터 경작하고 있던 영지의 점유권을 승인하거나 새로운 영지를 부여하였다. 이에 대하여 어가인은 장군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군역 등 여러 형태의 봉공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원뢰조(源賴朝)는 어가인을 정치적·군사적 기반으로 하고, 자신의 측근 관료를 정치 기구의 장(長)에 앉혀 막부 정치를 주도해 나갔다.
막부의 중앙 정치 기관으로는 시소·공문소·문주소가 있었다. 시소는 원(源)씨와 주종 관계를 맺은 어가인을 통솔하고 군사와 경찰 사무를 담당하였으며, 공문소는 정무 일반을, 문주소는 소송과 재판을 담당하여, 군사·행정·사법의 3기관만으로 간단히 구성되어 있었다. 이 기관들이 각기 정무를 분담하면서 중요한 문제는 3기관의 장관을 포함한 중신들이 합의하여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최종 결정권은 장군인원뢰조(源賴朝)에게 있었으므로 사실상 독재정치로 이루어졌다.
한편 전국 각지에는 수호(守護, [슈고])를 두었다. 수호는 유력한 어가인을 임명하여 관할 지역의 어가인을 통솔하고, 장군의 명령에 따라서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하였다. 평시에는 반역자와 살인자를 단속하고, 전시에는 관할 지역의 무사를 지휘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다. 수호는 특별한 보상은 없었지만 지두(地頭, [지토])를 겸하면서 발생하는 수입에 의존하였다.
장원이나 공령(公領)에는 지두를 두었다. 지두는 어가인 중에서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수호가 겸하기도 하였다. 특정한 장원을 지배하던 어가인을 그 지역의 지두로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고, 전혀 다른 곳의 장원이나 공령의 지두로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두는 조세 징수, 경작지 관리, 치안 유지를 임무로 하였다. 그러나 겸창막부는 전국을 모두 지배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동경에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여 귀족인 공가(公家)가 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조정이 엄연히 존재하였다. 겸창막부는 동부 일본의 정권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며, 공가와 무가에 의한 이원적 지배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2. 집권 정치의 전개
원뢰조(源賴朝)가 죽은 뒤에 그의 큰아들 원뢰가(源賴家,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장군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1203년에원뢰조(源賴朝)의 아내 북조정자(北條政子, [호조 마사코])의 아버지 북조시종(北條時宗, [호조 도키무네])이 원뢰가(源賴家)를 추방하고원뢰조(源賴朝)의 둘째 아들 원실조(源實朝,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옹립하였다. 이는 원뢰가(源賴家)가 북조(北條)씨의 배척을 도모하면서 독재를 지향해 나가는 데 대한 견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북조시종(北條時宗)은 스스로 장군을 보좌하고 막부 정치를 총괄하는 집권(執權, [싯켄])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고 집권 정치를 폈다.
북조(北條) 가문은 원래 이즈 지방의 중소 무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원뢰조(源賴朝)의 장인인 북조시종(北條時宗)이원뢰조(源賴朝)와 함께 평씨(平氏, [헤이시]) 타도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북조시종(北條時宗)의 딸이자원뢰조(源賴朝)의 아내였던 북조정자(北條政子)는원뢰조(源賴朝) 사후 항간에서 ‘이장군(尼將軍, [아마쇼군])’으로도 불릴 정도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북조시종(北條時宗)의 아들인 북조의시(北條義時, [호조 요시토키])는 시소의 장관으로 강력한 세력이었던 화전씨(和田氏)를 멸망시킨 뒤 시소의 장관까지 겸하여 막부 내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그리하여 막부의 실권은 북조의시(北條義時)가 장악하게 되고, 장군인 원실조(源實朝)의 지위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
1219년 3대 장군 원실조(源實朝)가 원뢰가(源賴家)의 아들 공효(公曉, [구교])에 의하여 암살되고 공효 또한 북조(北條) 가문에 의하여 살해됨으로써 원(源)씨 집안의 정통이 끊기게 되었다. 이에 북조(北條) 집안은 교토의 섭관가(攝關家) 자손인 구조뢰경(九條賴經, [구조 요리쓰네])을 4대 장군으로 맞이하였다. 교토에서 맞아들인 장군은 실권이 전혀 없이 모든 권력을 집권인 북조(北條) 가문에서 장악하고 있었다. 그 후 북조(北條) 집안은 100년 넘게 겸창막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원뢰조(源賴朝)와 어가인 사이에 형성된 주종 관계는 그대로 북조(北條)씨와 어가인 사이의 주종 관계로 전환되었다.
한편 교토의 조정에서는 겸창막부를 붕괴시키고 빼앗긴 권력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후조우(後鳥羽, [고토바]) 상황은 막부 내부에서 내분이 연이어 발생하자, 1221년 조정의 세력을 만회하려고 승구(承久, [조큐])의 난을 일으켰다. 후조우(後鳥羽) 상황은 막부 타도를 내세우면서 전국의 수호, 어가인들에게 동원령을 내렸으나 이 뜻에 따라 동원된 군사력은 매우 적었다. 반면 대부분의 어가인들은 막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강하게 결속하였으므로, 겸창막부는 1개월 만에 승구의 난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난을 평정한 후 막부는 천황을 폐하는 한편, 후로우 상황과 그 지지자들을 유배하였다. 상황에게 가담하였던 무사나 귀족들의 장원은 몰수하여 전공을 세운 무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의하여 동쪽 지방에 편중되어 있던 막부의 실질적 지배권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교토에 있던 조정의 군사 조직과 무사를 해체하고 육파라탐제(六波羅探題, [로쿠하라탄다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조정을 감시하는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군사권도 막부가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나아가 황위 계승과 상황의 결정권도 막부가 장악하였다. 이로써 조정과 막부의 이원적 지배 체제는 끝나고 막부의 정치적인 우위가 확립되었다.
북조의시(北條義時)의 뒤를 이어 집권이 된 북조태시(北條泰時, [호조 야스토키])는 1225년에 보좌역인 연서(連署, [렌쇼])를 두고, 합의를 통하여 정책을 심의하는 평정중(平定衆, [효조슈])을 설치하여 독재적인 통치 방식을 합의제로 바꿨다. 평정중제란 유력한 어가인의 합의제로서, 집권·연서와 함께 중요한 정무 처리와 소송을 합의하여 결의하는 것이었다. 이는 집권의 독단 전횡을 방지하자는 것이었는데, 막부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어가인이 주체가 된 합의제 정치를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평정중제 이후 정소(政所, [만도코로])와 문주소에서는 막부 재정과 재판 업무를 담당하고, 일반 정무의 최종적인 결정이나 중요한 재판은 모두 평정중에서 의결하게 되었다.
북조태시의 쇄신 노력은 1232년 무가 최초의 법전인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 [고세이바이시키모쿠])』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 법전은 중국의 성문법을 수입하여 제정하였던 고대의 율령과는 달리,원뢰조(源賴朝) 이래 무가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던 관례와 간단한 도리를 기본으로 한 것이었다. 모두 51개조의 식목(式目)으로 구성되었으며, 신분 고하를 불문하고 공평하게 재판 기준을 정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이는 무가 정치에서 법치주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합의제와 법치주의는 어가인의 지지를 기대하며 실시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집권 정치는 평정중의 협력과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실현되었다.
3. 득종 정치와 독재 체제의 확립
1242년 북조경시(北條經時, [호조 쓰네토키])가 4대 집권에 취임하였으나, 병으로 인하여 1246년에 동생인 북조시뢰(北條時賴, [호조 도키요리])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북조시뢰(北條時賴)는 북조(北條)씨에게 심복하지 않는 세력을 모두 제거하면서 독재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하지만 어가인 사이에서 불만이 높아지자, 1249년 인부(引付, [히키쓰케])를 설치해 어가인의 소송과 재판을 신속하고 공평하게 처리하고 의무를 줄이는 등 어가인 보호 정책도 시행하였다. 그는 1256년 출가하여 집권을 사임한 뒤에도 집권 북조(北條)씨 집안의 상속자인 득종(得宗, [도쿠소])으로서 막부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1268년 원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한 데 대하여, 8대 집권 북조시종(北條時宗, [호조 도키무네])을 중심으로 한 겸창막부가 이를 거부함으로써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원의 침략을 받았다. 원의 침략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겸창막부는 조정이 가지고 있던 외교권을 빼앗아 독자적인 강경 외교를 폈으며, 군량미 징수 등을 통하여 장원에도 개입하는 등 권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하지만 전쟁 이후 어가인들은 막대한 전비를 부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은상(恩賞)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궁핍에 시달리면서 막부에 대한 불만을 쌓아 가고 있었다. 어가인은 전쟁 비용을 너무 많이 부담해서 생활이 어려워졌고 영지를 잃는 경우도 늘어났다. 또한 무가 사회의 관례인 분할상속제로 영지가 세분화되어 감으로써 이들의 붕괴는 더욱 촉진되었다.
겸창막부는 1297년에 덕정령(德政令)을 반포하여 어가인의 토지를 매매하거나 담보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무상으로 반환하게 하였다. 그러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어가인 사이에서는 돈 빌릴 방법이 궁색해지면서 오히려 불만이 더욱 커졌다. 어가인 구제책의 실패는 막부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켜서 상호간의 대립을 낳았고, 이는 막부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지만 북조(北條) 가문은 전제 정치를 강화함으로써 이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집권 북조시종(北條時宗)은 평정중과 같은 공적인 정책 심의 기관을 제외시키고, 자신의 저택으로 가신들을 불러 회의하며 정무를 독단적으로 처리하였다. 북조(北條) 집안의 적자(嫡子)인 득종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북조 가문은 중앙기관의 요직을 독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정중에도 북조 가문 일족을 임명하여 합의제를 유명무실하게 하였다. 이러한 득종 권력은 호조 도키무네의(북조시종의) 아들인 북조정시(北條貞時, [호조 사다토키]) 시대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었다. 전제 정치의 강화는 오히려 막부의 정치 체제를 동요시키며, 북조씨를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4. 겸창막부의 멸망
14대 집권 북조고시(北條高時, [호조 다카토키])가 14세의 나이에 취임하여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어가인들은 막부에 대하여 더욱 반감을 갖게 되었다. 막부는 어가인에 대한 통솔력을 상실하였고, 수호와 지두도 막부로부터 이반하였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막부가 조정에 간섭하는 데 불만을 품어온 후제호(後醍醐, [고다이고])천황(天皇)이 겸창막부에 반대하는 세력을 결집하여 막부 타도의 기치를 내세웠다.
고다이고 천황은 1324년의 1차 거병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한 뒤에도[정중의 변], 막부 토벌을 위한 준비를 계속하였다. 이 시도는 측근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어 천황이 오키로 유배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기내(畿內)를 중심으로 한 사원 세력과 북조(北條)씨의 정치에 반발하는 어가인들이 각지에서(각 지방에서) 거병하였다. 1333년 고다이고는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반 북조씨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막부가 반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하여 보내었던 족리고씨(足利高氏,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반란군과 합류함으로써 교토의 육파라탐제가 함락되었다. 그리고 동부 일본의 유력한 어가인인 신전의정(新田義貞, [닛타 요시사다])가 주변 지역의 어가인을 통솔하여 겸창을 공격하였다. 1333년 5월 북조고시(北條高時)를 비롯한 북조씨 일족이 겸창에서 자살함으로써 겸창막부는 멸망하였다.
참고문헌
- 구태훈, 『일본고대·중세사』, 재팬리서치 21, 2008.
- 박경희,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일빛,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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