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산부(甲山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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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갑산 지방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갑산부는 1461년(세조 7) 설치되어 1896년(고종 33) 관제 개혁에 따라 갑산군으로 바뀔 때까지 함경도 갑산 지방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기능하였다. 진관(鎭管) 체제 아래의 독진(獨鎭)으로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하였으며, 진영장(鎭營將) 체제에서는 좌영장(左營將)을 맡았다. 조선전기 평안도 지역 사군(四郡)의 개척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등 조선시대 북부 지방의 행정·군사 중심지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갑산부는 고구려의 영토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발해 때에는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에 속해 있었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오랫동안 이 지역에 거란 및 여진이 분산해 거주하였다. 고려말 공민왕 무렵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고 북진하여 함경남도에 해당하는 지역은 대체적으로 회복하였으나, 허천부(虛川府)로 불리던 이 지역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1388년(고려 우왕 14)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이성계가 실권을 잡은 뒤, 그의 선조가 출생하고 성장한 땅을 회복한다는 뜻에서 더욱 북진하여 1391년(고려 공양왕 3) 이 지역을 갑주(甲州)라 칭하고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했다.

조선이 건국한 뒤 1413년(태종 13) 10월 15일, 전국의 군현 가운데 ‘주(州)’ 자를 가진 고을을 모두 ‘산(山)’이나 ‘천(川)’ 자로 바꾸었다. 이때 갑주도 갑산(甲山)으로 바꾸었다(『태종실록』 13년 10월 15일). 1415년(태종 15) 만호부를 군(郡)으로 바꾸고, 장관을 지군사(知郡事)라 칭하였다(『태종실록』 15년 12월 7일). 당시 갑산은 여연(閭延), 후주(厚州), 무창(茂昌) 등의 지역을 관할하였다. 1416년(태종 16) 여연이 읍치인 갑산과 너무 멀다는 이유로 갑산군 관하의 일부를 분리해 지금의 중강진 부근에 여연군(閭延郡)을 설치하고, 이듬해 함길도에서 평안도로 이관시켰다(『태종실록』 16년 7월 25일) (『태종실록』 17년 5월 13일). 아울러 후주와 무창을 여연군으로 이속하였다. 1437년(세종 19) 진(鎭)을 설치하고 겸절제사(兼節制使)를 두었다. 1461년(세조 7)에 도호부사(都護府使)로 승격시켰다.

조직 및 역할

도호부사(都護府使) 즉 부사(府使)는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 종3품으로 임기는 30개월이었다. 1757년(영조 33)에 무관의 자리로 만들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부사에 직속된 이속(吏屬)으로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3명, 군관(軍官) 100명, 아전(衙前) 80명, 지인(知印) 20명, 군뢰(軍牢) 30명, 사령(使令) 90명, 관노(官奴)·관비(官婢) 126명, 교노(校奴)·교비(校婢) 23명, 무남(巫男)·무녀(巫女) 16명이 있었다. 진관 체제 아래 독진으로 갑산진관(甲山鎭管)을 구성하였으며, 부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였다.

갑산의 관할 행정구역으로는 『여지도서』에 14사(社)가 소개되어 있다. 관아가 소재한 읍사(邑社)를 위시하여 허천사(虛川社), 호린사(呼獜社), 웅이사(熊耳社), 종포사(終浦社), 이리사(二里社), 회사(會社), 동인사(同仁社), 운총사(雲寵社), 혜산사(惠山社), 별해사(別害社), 허린사(虛獜社), 별사(別社), 진동사(鎭東社)가 있었다.

변천

1656년(효종 7) 각 도에 영장(營將)을 설치하면서 부사가 좌영장을 겸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가 대구역주의인 8도제에서 소구역주의인 23부제로 바뀔 때에 갑산부로 되어 관하에 갑산군과 삼수군(三水郡)을 두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 다시 전국을 13도 8부 1목 331군으로 개편할 때 갑산부는 폐지되고 함경남도 소속의 갑산군이 되었다(『고종실록』 33년 8월 4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손정목,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 일지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