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포(遊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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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역을 부담하지 않던 한유자에게도 포목을 거둬야 한다는 주장.

개설

유포는 한유자(閑遊者)에게 부과하려던 포를 가리키며 한유자의 범위는 경우에 따라 달랐다. 대개는 양반도 아니고 상민(常民)도 아닌 그 중간층을 가리켰다. 즉, 양반보다는 지위가 미약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민이라고는 할 수 없는 교생(校生)· 군관(軍官)·한량(閑良) 등을 가리키며 때로는 서얼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양반에서 갈라져 나온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상민 가운데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여 교생(校生)·업유(業儒)·업무(業武)에 불법적으로 끼어든 자들이 많았다.

내용 및 특징

유포는 평민 상층부 계층의 한유자에게 포를 부과하려던 주장이다. 넓은 의미의 유포는 평민 상층부뿐만 아니라 양반 가운데 관리나 생원·진사를 제외한 나머지 양반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에게 부과하려 했던 포는 유포(遊布)와 구분하여 대개 유포(儒布)라고 불렀다.

변천

유포를 징수하자는 논의는 17세기 전반부터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번번이 거부되었다. 그 후 숙종 말년부터 경종대에 이르기까지 호포·구전·결포와 함께 이른바 ‘양역사조(良役四條)’ 중의 하나로 거론되어 검토되었지만 영조 즉위와 함께 사실상 폐기되었다.

1750년(영조 26) 균역법이 제정되어 양역이 군포 2필에서 1필로 줄어들자, 줄어든 재정을 대신해 줄 방책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한 방안의 하나로서 유포론이 부분적으로 채택되었는데, 이후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라는 이름으로 징수되었다(『영조실록』 28년 6월 29일).

참고문헌

  • 김성우, 「조선후기 ‘한유자’층의 형성과 그 의의」, 『사총』40·41, 1992.
  • 이준구, 「조선후기의 ‘업유·업무’와 그 지위」, 『진단학보』 60, 1985.
  • 정만조, 「균역법의 선무군관-한유자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18, 1977.
  • 정만조, 「숙종조 양역변통론의 전개와 양역대책」, 『국사관논총』 제17집, 1990.
  • 정만조, 「조선후기의 양역변통논의에 대한 검토: 균역법성립의 배경」, 『동대논총』 7, 1977.
  •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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