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사(長興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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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창부위변광보 집안의 원당이었던 경기도 여주의 사찰.

개설

경기도 여주상두산(象頭山)에 소재한 장흥사(長興寺)는 선조 때에는 자문지를 관청에 납부했으며, 현종 때에는 송시열이 거처한 적이 있었다. 17세기에 경순군주의 남편 변광보 집안의 원당이 되었으나 얼마 후 폐사되었다. 장흥사가 있던 자리에 현재는 약천사가 들어서 있으며, 장흥사동종은 서울 봉은사에 보관되어 있다.

내용 및 특징

(1) 유래

장흥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장흥사 뒷산은 코끼리 머리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상두산(象頭山)이라고 부른다. 1530년(중종 25)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상두산에 있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1799년(정조 23) 간행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되었다고 하였다. 아마도 18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약천사(藥泉寺)가 들어서 있다.

(2) 변천

선조 때에 장흥사에서 자문지(咨文紙)를 공납(貢納)했는데 품질이 나빴다는 기록이 있다(『선조실록』 32년 5월 26일). 임진왜란이 끝난 후 부족한 종이를 사찰에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17세기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사찰의 종이 조달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1673년(현종 14)에는 송시열(宋時烈)이 신륵사에 있다가 장흥사로 옮겨 잠시 거처한 적이 있다. 송시열은 기호(畿湖) 사림의 영수(領袖)로 추앙받았으나 윤증(尹拯)과 대립하면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된 후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3) 황창부위 집안의 원당

그 후 장흥사는 1686년(숙종 12)에 폐사의 위기를 맞는다. 변광보(邊光輔) 집안에서 변광보의 묘를 장흥사에 이장(移葬)하고 원당(願堂)으로 삼고자 하였다. 변광보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딸인 경순군주(慶順郡主)와 혼인하여 품계가 봉순대부(奉順大夫)에 오르고 황창부위(黃昌副尉)에 봉해졌는데, 그의 무덤을 1662년(현종 3) 3월에 영평(永平)의 갈현(葛峴)에 조성하였지만, 1686년에 장흥사로 이장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숙종은 변광보가 왕실의 어른이었으므로 처음에 이장을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승지송창(宋昌)의 반대로 윤허하지 않았다(『숙종실록』 12년 3월 28일). 결국 변광보의 묘는 장흥사 북쪽 기슭으로 이장되었다. 이때 숙종은 변광보 집안에 장흥사와 상두산의 토전(土田)을 하사하고 무덤을 지키는 노비를 지급해 주어, 사실상 장흥사는 변광보의 원당이 되었다.

(4) 봉은사 소장의 장흥사동종

서울 봉은사에는 장흥사동종(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6호)이 소장되어 있다. 그 명문에 "홍무 25년 9월 17일 천녕에서 상두산 장흥사 동종을 만들었다[洪武貳拾伍年九月拾七日 川寧土 象頭山長興寺鐘造成]"고 기록되어 있다. 홍무 25년은 1392년(태조 즉위)이므로 7월의 조선 건국 직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은 18세기에 장흥사가 폐사된 후에 봉은사로 옮겨 봉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 허흥식,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아세아문화사, 1984.
  • 재단법인 불교문화재연구소, 『한국사지총람』상, 문화재청,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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