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압(睿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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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세자가 사용한 서명.

개설

예압(睿押)은 왕세자가 사용한 서명으로 왕이 사용하는 어압(御押)에 해당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왕세자의 예압 사례는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지어준 ‘달자압(達字押)’이 유일하다. 달자압은 영조가 초서체(草書體)로 직접 쓴 것이다.

내용 및 특징

예압은 왕세자가 문서에 사용한 서명이다. 왕에 대해서는 ‘어(御)’ 자를 왕세자에 대해서는 ‘예(睿)’ 자를 사용하여 어제(御製)는 예제(睿製), 어압(御押)은 예압(睿押), 어휘(御諱)는 예휘(睿諱) 등과 같이 왕과 왕세자의 지위와 위상에 따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현재까지 왕세자 예압을 사용한 경우는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가 유일하다. 사도세자의 예압은 『영조대왕훈유(英祖大王訓諭)』라는 탁본첩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1743년(영조 19) 영조는 사도세자의 관례 때에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지어주는 동시에 그 내용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석판 22매에 그대로 새겼다. 그중에는 사도세자의 자(字)를 윤관(允寬)이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세자에게 달자압을 내려주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라고 당부하고 있다. 즉, “나의 압(押)은 통(通) 자인데 예전에 하사받은 것이다. 삼가 힘쓰라는 의미에서 내가 직접 너에게 써주니 장래에 사용하도록 하라. 조만간에 신하들이 지어서 바친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느냐?”라는 내용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예압인 ‘달’ 자를 초서로 직접 써주었다(『영조실록』 19년 2월 30일).

사도세자의 예압이 실제 사용된 사례는 1761년(영조 37) 4월 8일에 사도세자가 평양에 갔을 당시에 작성해준 문서에서 볼 수 있다. 이 문서는 “오늘의 만남은 그 일이 우연히 아니네. 16자의 필적으로 그대의 금권에 짓노라.”라는 4언시와 “신사년 4월 8일에 기성(箕城)에 사는 유학 이대심(李大心)에게 내리니 곧 선조의 후예이며 화의군(花義君)의 후손이다.”라고 하여 문서의 작성 일자와 수취자에 대하여 자세히 기재해두었고, 말미에 영조가 지어준 초서체의 달자압을 기재하였다.

인장과 함께 서명은 공적·사적으로 법적인 효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로 문서의 위조를 방지하거나 문서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1. 00015989_그림1_『영조대왕훈유(英祖大王訓諭)』와 석판 일부분
    1. 00015989_그림2_사도세자의 예압 사용 실례

참고문헌

  • 수원화성박물관 외, 『사도세자』, 2012.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2013.
  • 조미은, 「조선시대 왕세자 대리청정기 문서 연구」, 『고문서연구』 36 , 2010.
  • 조미은, 「조선시대 왕세자문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