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앙(移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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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벼를 재배할 때 모판을 만들어 일정기간 동안 육묘(育苗)한 다음 모내기하는 경종법(耕種法).

개설

이앙(移秧)은 본래 모내기 자체를 의미하지만, 모내기를 하기 위해 못자리를 마련하여 옮겨심을 모[秧]를 키우는 작업을 포함한 경종법인 이앙법(移秧法) 자체를 가리킨다. 이앙법이란 논에서 벼를 경작하기 위해 기경, 파종, 초기 묘(苗) 관리에 이르는 전반적인 작업과정을 포괄하는 경종법(耕種法)의 하나다.

이앙은 조선초기 세종대인 1429년에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說)』에 삽종(揷種)이라는 명칭과 함께 3가지 벼 경종법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농사직설』은 삽종의 향명(鄕名)을 묘종(苗種)이라고 기재하고 있었다. 이앙은 15세기 무렵 경상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통용되었는데, 16세기 이후 하삼도(下三道)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17세기 후반 이후 벼 재배법의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농사직설』에 소개되어 있는 이앙법의 기술 내용을 살펴보면, 모판의 관리, 이앙의 구체적인 방식 등이 잘 정리되어 있어 그 기술내용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고려후기 14세기 후반에 이미 이앙법이 알려져 있었고, 일부 농민들이 이앙법을 활용하고 있었다. 고려말에 활약한 인물들의 시문(詩文)에서 당대 이앙법의 존재를 알려주는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15세기 초반 태종대에 편찬된 『농서집요(農書輯要)』도 이앙법 기술을 수록하고 있다. 『농서집요』는 중국 황토고원에서 수도(水稻)를 재배하는 방식을 옮겨놓으면서 문맥을 바꾸면서 당시의 농업기술, 즉 이앙법으로 번안하였다. 『농사직설』은 삽종(揷種) 즉 묘종(苗種)이라는 명칭으로 이앙법의 기술체계를 소개하였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이앙법의 존재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초기 벼 경종법으로서 이앙법의 존재 여부 보다 이앙법이라는 기술을 당시 농민들이 어떻게 보급, 확산시켜 나갔는가라는 점에 강조점을 둘 수 있다.

이앙법은 모내기법으로 모판에서 모를 키우다가 본답에 옮겨심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앙법에 대하여 『농사직설』의 편찬자는 이앙법을 설명하는 항목 끝 부분에 제초에는 편하지만 큰 가뭄이 들면 실수하게 되어 농가의 위험한 일이라고 단서를 붙여놓았다. 이러한 이앙법의 약점을 지적하는 것은 조선의 기후조건에 비추어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 초여름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이앙을 한다는 것은 시기를 잘 맞추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태종대에는 이앙법에 대한 금령(禁令)까지 내려졌다.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15세기 무렵에 이앙법은 강원도와 경상도 일부지적에서 채택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앙법은 16세기를 거치면서 경상도 전역과 전라도·충청도의 일부 선진 지역까지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초반 경상도의 상당 지역과 영동 지역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에서는 이앙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1512년(중종 7) 강원도관찰사고형산(高荊山)은 영동과 영서의 농사 형편을 설명하면서 영동 지역에서는 오로지 묘종 즉 이앙에만 힘쓰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영서지방은 비록 홍수와 가뭄이 들더라도 수전과 한전이 반반씩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전체 농사를 전부 망치는 데까지 이르지 않지만, 영동 지방은 비록 수전이 많아도 수경직파에 힘쓰지 않고 묘종만 일삼기 때문에 가뭄이나 홍수, 바람의 재앙이 들게 되면 이앙하는 시기를 놓치게 되어 수확이 부실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16세기 초에 이르면 이앙법이 경상도·강원도 지역으로 확산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제한하거나 금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16세기 중반 이후에 이르게 되면 이앙법은 경상도 지역 여러 곳으로 보급되어 나갔고, 또한 전라도·충청도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16세기 후반부에 전라도 옥과 지역에 이미 이앙법이 보급된 상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삼남(三南)의 여러 지역으로 이앙법이 보급되어 있었다.

한편 충청도 지역의 경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충청도 임천(林川)에서 피난생활을 한 오희문(吳希文)의 일기인 『쇄미록(瑣尾錄)』에 따르면, 이앙법의 원리가 수도(水稻)재배에 동원되고 있으며, 나아가 이앙법에 의한 수도재배를 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벼농사에 나선 오희문이 채택한 경종법은 직파법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벼의 묘가 성기게 자라는 곳에 보묘(補苗)를 하고 있었다는 찾아볼 수 있다. 부분 이식에 나서고 있다는 점 자체가 옮겨심기라는 이앙법의 원리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보묘를 하는 시기가 음력 5월로 설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앙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앙기(秧基)에서 자라고 있던 화묘(禾苗)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충청도 지역에서도 적어도 16세기 말경 이앙법의 원리를 활용한 벼 경작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16세기 중반 이후 이앙법이 지역적으로 시기적으로 편차를 보이며 전국적으로 보급된 사정은 농서에 기록된 경종법의 증보, 앙기(秧基) 작성의 변화, 건앙법(乾秧法)의 개발·보급 등 때문이다. 이러한 이앙법의 보급 원인으로 소규모 보 시설의 증가와 같은 수리시설의 점진적인 호전, 농업에 관한 지식이 향상되면서 이앙법이 제초노동력의 절감, 토지생산성의 향상이라는 이점을 농민들이 알게 되었다. 직파에서 4~5차례의 제초작업이 필요하던 것이 이앙을 할 경우에는 2~3차로 그칠 수 있었고 이렇게 절감된 노동력을 다른 방면에 투자할 수 있다는 점과 이앙법에서의 수확량이 직파에 비해서 높게 나타난다는 점, 이앙을 하면 모맥이모작(稻麥二毛作)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앙법이 보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앙법의 경제적 유용성뿐만 아니라, 물 문제라는 이앙기의 난점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의 발달이 이앙법 보급의 또 다른 이유다. 실로 이앙법의 보급은 이앙법의 기술 수준의 진전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것은 이앙법을 구성하고 있는 세부적인 기술 요소로서, 앙기관리와 앙기시비에서 나타난 발전, 그리고 이앙시기를 적절하게 맞추기 위한 파종시기의 선택 등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앙법 실행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 보조적인 기술도 개발되었다. 또한 이앙법의 채택으로 야기되는 노동력의 집중적인 투입, 즉 이앙기에 필요한 대규모 노동력의 동원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노동조직으로서 두레의 형성이라는 농업 여건의 변화가 특히 삼남지방 전역에 이앙법이 보급될 수 있는 배경이었다.

변천

이앙법 기술체계 발달의 특이한 양상이 바로 건앙법(乾秧法)의 개발이다. 이앙법과 건경법(乾耕法)을 결합시킨 건앙법은 이앙법을 수행할 때 따르는 물 문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건앙법의 기술적인 내용은 17세기 초반의 농서인 『농가월령』에 소개되어 있다. 건앙법의 기술 내용 가운데 건앙(乾秧)을 키우기 위한 건경법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건앙은 이앙법이 직면하는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특히 시비(柴扉)라는 독특한 농기구를 이용하여 건조한 토양에서 수분의 유지와 제초작업에 매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러한 건앙법의 발전은 이앙법의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고 나아가 이앙법이 보급되는 데 중요한 배경요인으로 평가되었다.

16세기 후반 이래 이앙법이 단계적으로 보급된 요인은 이앙법의 기술적인 체계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앙기(秧基) 관리의 강화, 앙기 시비의 강조를 통하여 도앙(稻秧)을 건실하게 육성하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해 제초노동력을 절감시키는 이점이 있다.

이앙시기의 조절을 위하여 파종 시기를 『농사직설』 단계와 달리 설정하고 있었다. 『농사직설』의 이앙법은 파종 시기가 너무 이르게 설정되어 있어 이앙기에 적절하게 물대기가 불리하였다. 이앙법을 채택하기 위하여 파종하는 시기를 늦추어 초여름 강우기에 이앙할 수 있게 하였다.

이앙법이 보급된 또 다른 배경에는 수전(水田)의 위치, 토질 등 전토의 주변조건의 제약으로 이앙법을 채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수전이 많이 등장하고 있었다는 점이 있었다. 토성(土性)이 이앙을 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배경이라는 인식, 또는 수전의 최하등지에서는 이앙하는 것이 수경직파하는 것보다 수월한 방식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의의

이앙법은 조선시대 벼 경종법의 변천을 대표하는 기술이다. 이앙법, 즉 모내기법은 조선초기에 일부 지역에서 시행되다가, 16세기를 거치면서 하삼도 지역 일대로 점차 보급되었고,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삼남의 지배적인 벼 경종법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앙법을 토대로 논에서 벼를 재배하고, 밭에서 다른 잡곡을 재배하는 양상이 농촌의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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