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사(慈悲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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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던 황해도 자비령의 사찰.

개설

자비사(慈悲寺)는 나한당(羅漢堂)이라고도 불렸다.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말 이색(李穡)이 중국으로 가는 길에 자비사에 들렀으며 그곳의 나한당이 여행자들의 기도처라고 하였으므로, 고려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자비사가 있던 곳은 군사적 요충지였으므로, 조선후기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절의 승려들에게 승병(僧兵)의 역할을 부여하고, 비상시를 대비하여 별도의 잡역(雜役)을 면제하도록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자비령은 황해도와 평양의 경계가 되는 지점에 높이 솟아 있어서 영(嶺)의 북쪽은 평양에 속하고 남쪽은 황해도에 속하는데, 자비사는 그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원래는 소승 수행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인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한국에서는 부처의 제자를 이르거나 신통력이 높은 산신(山神)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비령의 나한당은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어 여행자들의 기도처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에 이색(李穡)은 좌가부승록(左街副僧錄) 계명사(啓明寺) 주지 정해(定海)의 제자 성주(省珠)의 부탁을 받고 자비사의 기문을 지었다. 그에 따르면, 이색이 젊었을 때 연경(燕京)에 가는 길에 자비사에 들른 적이 있는데, 당시 자비사에는 축원하는 글들이 적힌 당번(幢幡)이 많이 걸려 있어서 화려해 보였다. 부엌과 마구간은 나그네를 대접하기에 알맞게 갖추어져 있었고, 자비사의 나한은 왕을 축복하고 지나가는 여행자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통력을 가진 불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자비령은 황해도와 평안도를 연결하는 고개이므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바로 그곳에 자비사가 있었기 때문에 자비사 승려들은 자연히 군역(軍役)의 임무를 담당한 승병(僧兵)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1680년(숙종 6)에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자비사의 승려들에게는 별도의 잡역(雜役)을 시키지 말고 위급한 때에 소용이 되게 하라고 하였다(『숙종실록』6년 1월 6일).

참고문헌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이봉춘, 「조선불교의 도총섭 제도와 그 성격」, 『사명당 유정』, 지식산업사, 2000.
  • 이종수, 「17세기 유학자의 불교인식 변화」, 『보조사상』37, 보조사상연구원, 2012.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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