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恩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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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은혜로 특별히 과거 합격을 허락하는 것을 말함.

개설

과거에서 은사는 왕이 특별히 합격을 허락하는 것으로 시험의 절차를 다 거치지 않아도 되었다. 성균관이나 사학(四學) 유생들에게 강경과 제술을 시험 보게 하여 성적 우수자에게 직부회시나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었다. 직부전시는 곧 은사로 급제와 다름이 없었다. 은사 합격자는 정원과 상관없었으며 방말(榜末)에 붙여서 발표하였다.

내용 및 특징

고려에는 과거에 열 번 합격하지 못한 사람에게 출신(出身)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조선초에는 고려에서와 같이 나이가 많거나 여러 번 낙방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은사과(恩賜科)를 두고, 회시에서 초장(初場)·중장(中場)·종장(終場) 삼장(三場) 중 한 장에만 합격한 사람에게 출신을 허락하였다(『문종실록』 1년 2월 19일).

조선초에 시행된 은사 급제는 1438년(세종 20) 고려의 제도로 선비를 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여 혁파되었다(『태종실록』 14년 9월 12일)(『세종실록』 20년 4월 24일).

은사과는 폐지되었으나 관학유생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평상시 유생 중에 은사로 2분 이상의 분수(分數)를 받은 사람에게 회시에 직부(直赴)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36년 2월 27일). 춘추로 시행된 도기(到記), 인일제(人日製), 절일제(節日製) 등에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에게 왕은 은사의 혜택을 베풀어 최종 시험인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었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직부전시가 많아졌다. 1879년(고종 16) 식년시에서 장원을 한 윤영수(尹英秀)와 갑과 2등 권태식(權泰植)은 직부전시로 급제하였다. 윤영수는 1878년(고종 15) 인정전(仁政殿)에서 설행된 추도기(秋到記)에서 직부전시의 은사를 받았고(『고종실록』 15년 10월 13일), 권태식은 1879년 2월의 춘도기(春到記)에서 직부전시되었다(『고종실록』 16년 2월 6일). 병과 4등으로 급제한 유진필(兪鎭弼)은 인일제(人日製)에서 직부전시되었다(『고종실록』 16년 1월 7일).

이들이 합격한 1879년 식년시는 합격자 49명 중 은사로 합격한 사람이 15명에 이르렀다. 1880년에 설행된 증광시의 합격자 69명 중 35명이 은사로 합격하였다. 직부전시의 경우 방말, 즉 합격자 명단 맨 끝에 부치는 것이 상례인데 1879년의 식년시는 갑과 1등과 2등이 모두 은사로 급제하였다. 『국조문과방목』에는 이들 이름의 상단에 ‘은(恩)’으로 표시하여 은사로 급제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문과뿐 아니라 소과에서도 은사 합격자가 많았다. 사마방목에는 은사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 종친인 전주이씨를 정원 외에 뽑거나(1865년 식년시) 개국공신의 적장손(1873년 식년시), 이이(李珥)·김굉필(金宏弼)의 종손(1885년 식년시) 등 명신의 후손, 세자와 같은 해에 출생한 갑술생을 대상으로 은사의 혜택을 주었다. 소과에서는 은사로 특부되더라도 초시는 거쳐야 했다.

변천

조선초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한 사람에게 특별히 등외(等外)의 급제를 허락하였다. 후기로 가면서 은사로 직부를 내리는 경우가 많아져 은사 합격자가 증가하였다. 직부전시인은 처음에는 식년시에만 응시하게 하였으나 나중에는 증광시·별시·정시의 전시에도 응시하게 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최진옥, 『조선시대 생원 진사 연구』, 집문당,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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