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수본(譯官手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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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중국 사행에 참여한 역관이 사행 과정에서 수집한 외교 정보와 문서 전달 및 접수 과정을 적어 왕에게 보고한 사행 보고서.

개설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 기록은 외교문서, 사행 기록, 사행 문서 등이 있다. 역관수본은 공적 사행 기록의 일종이다. 실무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역관이 폐쇄적인 중국의 행정 체계 및 언어적인 장벽을 넘어 조선의 외교문서를 전달하고 중국의 외교문서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시행하였던 각종 외교 활동 및 문서의 내용을 상세히 기술한 사행 보고서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역관수본이란 용어는 상대적으로 기재 횟수가 적지만, 조선시대 사행에 참여한 역관 가운데 수역(首譯)에 해당하는 당상역관이 사행 후 승정원에 제출하도록 규정화된 보고서이며, 조선의 대중국 외교정책 수립 및 향후 외교 활동의 전개에 기본 자료로 활용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작성 절차와 구성

조선시대 역관 가운데 중국사행에 참여하는 역관을 통사(通事)라고 통칭하였다. 세부적으로 상등은 통사, 중등은 압물(押物), 하등은 타각부(打角夫) 등의 직무를 담당하였는데, 통사의 우두머리를 수역(首譯)이라 하였다. 이들 통사 가운데 수역은 당상역관이 담당하였는데, 귀국하면 수본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는 사행 과정에서 각종 문서의 전달 및 중국 관원과의 접촉을 전담하는 주체가 수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사행 과정에서 가장 활동 범위가 넓었던 수역은 조선의 외교 목적 달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여 귀국 후 보고 사항이 가장 많았던 존재였다. 이들의 보고 사항은 정보로서의 가치가 높은 사항으로 평가되어 신분적인 천시 경향과는 상관없이 중시되었다.

개별 사행이 있으면, 사행원 가운데 삼사(三使: 정사, 부사, 서장관)와 통사(通事)는 사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건, 문견한 내용, 수집한 외교 정보 등에 관련하여 정사와 부사는 별단, 서장관은 문견사건, 통사는 수본 등을 작성하여 서장관이 종합하여 승정원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제출 기한을 어기거나 미제출 시에는 처벌을 받았다. 정사와 부사의 별단은 왕에게 복명 시 구두로 보고하는 것으로 대체하기도 하였지만, 서장관과 통사의 보고서는 반드시 제출되어야 했다. 역관수본을 포함하여 제출된 사신별단은 승정원에서 왕에게 아뢰어 어람한 뒤 승문원에 내려져 『승문원등록』으로 보존되었다.

2. 형식과 내용

사신별단의 한 형태였던 역관수본은 다른 별단, 문견사건 등과 달리 주제별·일자별 형식보다는 문서 전달 및 정보 파악 등 특정 사안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는 형식을 띠었다. 조선시대 외교 협상은 언어적인 장벽으로 인하여 역관이 전담하였으며, 중국의 폐쇄적인 행정 체계로 인하여 조선의 외교적 목적을 수록한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과정이 실질적인 외교 협상의 과정이었다. 역관수본을 통해서 중국에서 있었던 실질적인 외교 협상의 과정을 상세히 서술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조선의 외교문서를 제출한 관청, 중국 관리들의 반응, 중국에서 문제점으로 거론한 외교문서의 형식과 내용, 중국 내에서 외교문서의 결재 과정, 주로 예부와 내각에서 논의된 외교문서에 대한 대응, 황제의 재가 여부, 황제의 지시 사항, 중국의 외교문서 작성 과정, 중국 외교문서의 접수 과정, 접수한 중국 외교문서의 필사 내용, 중국의 구체적인 요구 사항 등이 역관수본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외에 중국의 정세 변화, 몽고를(몽골을) 비롯한 국제 관계, 황제의 동향, 각종 토벌과 전황, 풍흉으로 인한 사회현상, 조선 왕에 대한 황제의 관심, 사행노정에서 확인된 중국 관료 조직 등에 관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다.

일례로 숙종대 압록강 북변에 청나라 사람들이 전지(田地)를 개간하자 조선은 재자관(䝴咨官)을 파견하여 탐문하였는데, 귀국한 역관수본을 통하여 영고탑(寧古塔) 수장(守將)의 요청으로 유병(留兵)을 두어 개간할 것을 허락하는 황제의 명령이 있었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조선은 신속하게 청 중앙정부의 예부에 자문(咨文)을 보내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정책을 수립하였다(『숙종실록』 40년 12월 3일).

수역의 수본 이외에 선래통사(先來通事)의 수본도 있다. 선래통사는 중국에서 사행 목적(문서의 전달받음)을 달성하면 신속하게 조선에 상황을 통보하기 위하여 사행 중간에 파견한 통사이며, 조선사행이 중간에 선래통사를 조선에 파견하기 위해서는 예부로부터 표문을 받아야 했다. 이를 위하여 회동관의 제독(提督)에게 정문(呈文)을 보내고 제독은 이를 예부 상서에게 아뢰어 표문을 받아 다시 사행에 전달하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조선에 도착한 선래통사는 그동안의 상황을 종합하여 중간보고서 형식의 수본을 승정원에 제출하였다. 대부분의 사행에서 선래통사는 거의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선래통사의 수본도 상당수 존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3. 활용 및 보존

조·중 관계에서 실무외교관의 역할을 하였던 역관이 작성한 수본은 중국의 사정을 가장 정확하게 기술한 것으로 조선의 대중국 외교정책의 수립에 필수적인 자료로 활용되었다. 또한 역관은 신분의 한계로 인하여 수본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사적 사행기록(연행록과 같은 형식)을 작성하지 않았다. 대신 역관수본은 사역원에서 별도로 조선후기에 『통문관지』로 총 정리하여 역관들의 대중국 사행에 지침서로 활용하였다. 국가 차원에서 역관수본을 비롯한 각종 외교문서와 사행 기록을 정리하여 조선후기 대외 관계에 참조하고 증빙 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1788년(정조 12) 정조는 『동문휘고』를 편찬하였다. 역관수본은 승정원에 제출되어 왕의 어람을 거쳐 다시 승정원에 내려지면, 승정원에서 승문원으로 이관하고 승문원에서 외교문서 및 다른 사신별단과 함께 『승문원등록』으로 보존하였다.

의의

역관수본은 조·중 관계에서 조선의 대중국 외교정책 기조, 정보 수집 과정, 외교 활동의 실상 등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 또한 외교 절차와 왕래한 외교문서의 종류·내용 등을 상세히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 다른 사신의 별단, 서장관의 문견사건 등과 함께 중요 외교 자료로 활용하고 보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정치·외교사적 가치가 있다. 실제 사신의 보고서는 현지에서 역관의 보고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는 점에서도 역관수본은 가장 신뢰도가 높은 외교정보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통문관지(通文館志)』
  • 『동문휘고(同文彙考)』
  • 김경록, 「조선초기 통사의 활동과 위상변화」, 『한국학보』 101, 2000.
  • 김경록, 「조선시대 사행과 사행기록」, 『한국문화』 38, 2006.
  • 김경록,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문서의 접수·보존체계」, 『한국사연구』 136, 2007.
  • 김경록, 「조선시대 대중국 외교문서와 외교정보의 수집·보존체계」, 『동북아역사논총』 2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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