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모(又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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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곡을 받은 뒤에 더 받은 모곡.

내용

1827년(순조 27) 평안도 초산에서 환곡을 징수하며 규정 이외에 추가로 징수하여 문제가 되었다. 1826년에 거두어들인 쌀과 여러 곡식이 32,900여 석인데 1825년과 1826년 2년간 모곡을 받은 뒤에 다시 모곡을 거두어들이거나, 환곡을 받지 않은 집에서 모곡을 거두어들인 것이 쌀로 환산하여 2,300여 석이나 되었다. 이외에도 별잉곡(別剩穀)·사곡(私穀) 등의 명목으로 징수한 것을 합하면 8,100여 석인데, 이것을 24,000여 냥의 돈으로 바꾸어 횡령하였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로 인하여 초산부사를 지낸 서만수(徐萬修)는 처벌을 받고 귀양 갔다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6년 뒤인 1833년에 재조사가 이루어져서 누명을 벗게 되었다.

혐의를 받은 모곡을 징수한 뒤에 다시 징수하는 우모와 별잉은 고을에 으레 있는 폐단을 답습한 것으로, 사곡의 징수는 아전이 농간을 부린 것으로 판단되었다. 곡물을 돈을 바꾼 것 가운데 일부인 5,000냥으로는 전토를 사서 고을의 폐단을 구하려 한 것이고, 7,000여 냥을 아전에게 넘겨주어 지방관이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는 점은 지방관이 지방관아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환곡을 징수할 때에 규정된 모곡을 징수하고도 추가로 징수하거나 환곡을 받지 않는 가호에서도 모곡을 징수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환곡을 징수할 때에 지방관아에 소요되는 비용을 민인에게 전가하여 부담하게 하는 상황을 보여 주었다.

용례

所謂又耗別耗名色 皆是創出勒捧 而又耗云者 卽應耗後加捧之耗也 別耗云者 卽不受還之戶 徵捧無名之耗也 (『순조실록』 27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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