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전(永昌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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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있던 세조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영창전은 조선 제7대 왕 세조의 혼전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68년(세조 14)에 그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영창(永昌)’으로 정하고(『예종실록』 즉위년 9월 24일), 3개월 뒤 광릉(光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7실에 부묘할 때까지 영창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468년(세조 14) 9월 8일 세조가 수강궁(壽康宮)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자 조계청(朝啓廳)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3개월 뒤인 11월에 광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예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 이때 경복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영창전이다.

세조의 혼전은 경복궁의 옛 경희전(景禧殿)을 수리하여 사용하기로 하였다. 경희전은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혼전이었다. 『성종실록』에는 영창전이 문소전(文昭殿)과 가까운 곳에 있다고 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창경궁의 전신인 수강궁에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경복궁의 사정전(思政殿) 곁에 있었던 것 같다고 추정한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영창전으로 반우한 뒤 초우제(初虞祭)부터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練祭)를 지냈다. 예종이 즉위한 지 1여 년 만에 승하하여 세조의 국장(國葬)은 성종에게 넘겨졌다. 성종은 예종대에 미처 행하지 못한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1470년(성종 1) 12월 16일 세조의 신주를 영창전에서 받들고 와서 태묘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영창전은 세조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468년 11월 28일부터 종묘에 부묘한 1470년 12월 16일까지 경복궁의 경희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창전이 있었던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에 왜적이 궁궐을 불태웠을 때 소실되었다.

참고문헌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종묘의궤(宗廟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헌종황제사제문(憲宗皇帝賜祭文)」
  •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