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비(燃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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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수행 의식 가운데 하나로, 팔에 초의 심지를 올려놓고 불을 붙여 살을 태우는 의식.

개설

연비(燃臂)는 승려가 되기 위해 계를 받을 때, 머리를 삭발한 후 팔에 초의 심지를 세우거나 향불을 피워 살을 태우는 의식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육신의 고통까지도 감내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연원

연비는 고대 인도에서부터 유래되었다. 『범망경』에는 "몸을 사르고[燒身], 팔을 사르며[燒臂], 손가락을 사르어야[燒指] 보살"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묘법연화경』「약왕보살본사품」에는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 앞에서 보의(寶衣)를 걸친 뒤 신통력의 염원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살랐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처럼 불법을 받들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육신까지도 바치겠다는 서원을 다짐하는 의식이 연비이다. 중국 등에서는 머리에 초의 심지를 붙여 사르기도 하는데, 이는 연정(燃頂)이라고 한다.

내용 및 변천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실 가족이 병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낼 때 등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고통을 감내하는 연비를 시행한 기록들이 나온다. 왕실의 연비 의식은 모두 조선전기에 이루어졌으며, 조선후기에는 연비 의식을 치렀다는 기록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1402년(태종 2) 기우제를 치르던 승려들이 연비하였다는(『태종실록』 2년 7월 6일) 기사가 연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1408년(태종 8)에는 태종이 부왕의 병이 낫기를 빌기 위해 덕수궁 옆에 장막을 짓고 승려 100명을 불러 약사기도를 하고 몸소 연비를 하였으며(『태종실록』 8년 1월 28일), 1413년(태종 13)에는 원경왕후의 쾌유를 위해 태종과 세자, 왕자들과 승려들이 모두 약사기도를 하고 연비를 하였다(『태종실록』 13년 5월 6일).

1479년(성종 10)에는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비한 이유를 대신들에게 알리면서, 전날에 윤씨가 자신의 허물을 참회하는 방법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서 연비(燃臂)를 하겠다."고 맹세했으나 거짓으로 속이는 말에 불과했다고 언급한 기록이 나온다(『성종실록』 10년 6월 5일).

조선후기에 이르면 왕실의 불교식 의례가 모두 폐지되면서 연비 의식을 치렀다는 기록 또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1791년(정조 15) 이기경(李基慶)이 올린 상소문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영세를 하는 것은 불교에서 연비하는 것과 같다."(『정조실록』 15년 11월 13일)고 한 기록이 유일하다.

참고문헌

  • 『범망경(梵網經)』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 불교문화연구원, 『한국불교문화사전』, 운주사, 2009.
  • 김영태, 「조선 태종조의 불사와 척불」, 『동양학』1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88.
  • 조남욱, 「조선 태종의 탈불교 식과 그 한계」, 『동양철학연구』제63집, 동양철학연구회, 2010.
  • 차차석, 「『법화경』 소신공양의 문제점과 그 상징성」, 『불교학연구』제16호, 불교학연구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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