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성(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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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정유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에 그 지역을 점거하고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축조한 일본식 성곽.

개설

왜성은 남해안뿐만 아니라 내륙 지역에서도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그 유구(遺構)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실상은 알 수 없다. 남해안 일대에서는 이미 조사된 것만도 32개소에 달하였다.

내용 및 특징

왜성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침략지인 조선에 축조된 매우 특수한 사례에 속하는 성곽이었다. 왜성은 외견상으로나 축조수법, 혹은 시설에서 당시 일본의 성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침략지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방어기능 강화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거의 모두 항(港)의 확보를 위하여 총구(惣構) 시설 같은 것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 등 몇 가지 차이점이 있을 뿐이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왜성은 부산진성을 비롯하여 서생포성·가덕성·웅천성 등 32개소에 달한다. 이 가운데 1592~1593년 사이에 축조된 것이 부산성·부산지성·임랑포성·기장성·구포성·죽도왜성·가덕성·가덕지성·서생포성 등 19개이고,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에 축조된 것이 견내량왜성·울산성·양산성·마산성·고성성·사천성·남해성·순천성 등 8개이다. 그리고 마산성(김해시 생림면), 농소성(김해시 주촌면), 호포성(양산시 동면), 울포산성, 탑포산성 등 5개의 성은 그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왜성은 거의 대부분 전시 상황에서 축조되었기 때문에 방어상 유리한 산성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입지상으로는 강과 바다에 인접한 독립된 구릉, 혹은 야산을 택하고 있다. 왜성은 왜군이 선박을 통한 침략이었기 때문에 보급이나 연락 관계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배가 아니고서는 보급·연락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왜군 입장에서는 일본에 있는 후방기지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손쉽게 배를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아울러 일본의 산성이 대체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이 왜성 역시 주곽부(主郭部)를 중심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다중(多重)의 곽(郭)과 곡륜(曲輪) 배치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출입구는 하나같이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성 아래에 호즉·해자가 시공된 흔적이 남아 있다.

의의

왜성은 성곽 편년에 있어서 그 축성 연대가 확실하고 후대에 개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축성 당시 일본의 축성법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점에 의의가 있다. 이는 같은 시기 일본 국내에서 축조되었던 성곽이 후대에 계속 사용됨으로써 거듭 개·보수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 성곽 축성 시기의 축성법을 명확히 가려내기 어렵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 유재춘, 『근세 한일성곽의 비교연구』, 국학자료원, 1999.
  • 太田秀春, 「文祿·慶長の役における日本軍の築城觀の變遷について-朝鮮邑城の利用から倭城築城への過程を中心に」, 『朝鮮學報』 181,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