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모전(永慕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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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 있던 인종의 신주를 모신 혼전.

개설

혼전(魂殿)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영모전은 조선의 제12대 왕 인종의 혼전이다. 중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장경왕후(章敬王后)이다. 1545년(인종 1)에 인종이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영모(永慕)’로 정하고(『명종실록』 즉위년 7월 12일), 4개월 뒤 효릉(孝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10실에 부묘할 때까지 영모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545년(인종 1) 7월 1일 인종이 경복궁 청연루(淸讌樓) 아래 소침(小寢)에서 승하하자 사정전(思政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4개월 뒤 10월에 효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10월 15일). 이때 창덕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영모전이다.

혼전 장소로는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서연청(書筵廳), 창덕궁의 동궁 저승전(儲承殿) 등이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장소가 좁다든가 3년 동안 시사(視事)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창덕궁의 편전(便殿)인 선정전(宣政殿)으로 정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영모전이 경복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영모전은 인종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영모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일반적으로 혼전에서 거행하는 의식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영모전에 반우한 날 초우제(初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거행하였다. 그 밖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를 지냈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다른 혼전과의 차이라면, 초우제·졸곡제·연제 등에 명종이 친행(親行)하지 않거나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상제와 담제를 지낼 때에는 영모전에 나아가 친행하였으나 종묘의 부묘제(祔廟祭)는 섭행하였다. 그 밖에 명나라에서 내린 제사를 받는 의절은 혼전에서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선정전이 좁아 경복궁의 사정전에서 거행하였다.

부묘하기 하루 전인 1547년(명종 2) 9월 16일 인종의 신주를 영모전에서 모셔와 다음 날인 17일에 종묘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영모전은 인종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545년 10월 15일부터 종묘에 부묘한 1547년 9월 16일까지 창덕궁의 선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영모전이 있었던 창덕궁의 선정전은 정조, 순조, 헌종, 철종 등의 혼전으로 계속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종묘의궤(宗廟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
  • 정옥자 외,『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 김동욱, 「순조즉위년의 창덕궁 선정전 혼전활용에 대하여」,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05.
  • 이현진, 「명·청의 賜祭·賜諡에 대한 조선의 대응」, 『朝鮮時代史學報』6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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