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申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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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신하가 왕세자에게 아뢰거나 보고하는 일.

개설

신문(申聞)은 신하가 왕세자에게 보고 또는 아뢰는 말로 왕에게 사용하는 계문(啓聞)에 해당한다. 원래 왕에게 사용하는 용어로 쓰이다가 세종대부터 왕세자에게 사용하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내용 및 특징

신문은 신하가 정무와 관련하여 왕세자에게 보고하거나 아뢰는 일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초기까지 왕에게 아뢰는 일에 대해 모두 신(申) 자를 써서 사용하다가 세종대에 이르러 신문을 계문으로 고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5년 9월 11일).

이후 신문은 왕세자에게 어떤 사안을 보고하거나 아뢴다는 뜻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로 규정되었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따르면, 숙종대 왕세자인 경종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행할 때 계문을 신문으로 개칭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후 영조대와 순조대에 시행된 왕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에도 바뀐 규정대로 사용하였다(『영조실록』 51년 12월 8일), (『순조실록』 27년 2월 9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살펴보면, 신하가 달사(達辭)·신본(申本)·신목(申目) 등과 같은 문서로 왕세자에게 보고할 때 ‘의신문시행사(依申聞施行事)’라고 하여 ‘아뢴 대로 시행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문은 신하가 왕세자에게 보고하는 문서 가운데 하나인 신본의 결사(結辭) 문구에 쓰이기도 하였다. 신본의 문서식에 의하면, 결사의 내용은 ‘근구신문(謹具申聞) 복후휘지(伏候徽旨) 근달(謹達)’이라고 기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조미은, 「조선시대 왕세자 대리청정기 문서 연구」, 『고문서연구』 36 , 2010.
  • 조미은, 「조선시대 왕세자문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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