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녕전(肅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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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궁 혹은 창경궁에 있던 인조의 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인열왕후처럼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3년상이 아닌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숙녕전은 인조의 첫 번째 비 인열왕후의 혼전이다. 인열왕후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1635년(인조 13)에 인열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숙녕(肅寧)’으로 정하고(『인조실록』 13년 12월 17일), 장릉(長陵)에 장례를 치렀다. 이후부터 1649년(인조 27) 인조가 승하하고 3년상을 치를 때까지 숙녕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635년 12월 9일 인열왕후가 창경궁의 산관(産館)에서 승하하였다. 시신을 봉안하는 빈전(殯殿)을 어디에 마련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혼전의 전호(殿號)는 확인되지만 어느 궁의 어느 전각에 혼전을 마련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고, 1647년(인조 25)에 숙녕전을 경덕궁으로 옮겨 봉안하였다는 기록만 확인된다(『인조실록』 25년 11월 7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창경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숙녕전은 인열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숙녕전은 여느 혼전과 다른 역정을 겪었다. 인열왕후의 장례를 치른 날짜도 명확하게 알 수 없고 숙녕전에서 지내야 하는 우제(虞祭) 기록도 제대로 보여 주는 자료가 없다. 숙녕전에서 거행하였다는 졸곡제(卒哭祭)와 소상제(小祥祭) 기록만 확인된다. 소상은 11개월이 되는 이듬해 10월에 지내야 하는데 돌아가신 지 첫 번째 기일인 12월 9일에 지냈다(『인조실록』 14년 12월 9일).

소상제를 지낼 즈음 청나라가 침입하여, 종묘의 신주와 숙녕전에 봉안되어 있던 인열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강화로 가서 그곳에 임시로 봉안하였다. 이때 숙녕전의 신주에 칼자국이 생겨, 나중에 대신들과의 논의를 거쳐 개조(改造)하고 개제(改題)하였다.

인열왕후는 인조보다 먼저 승하하여 왕세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국상(國喪)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서 인열왕후의 상제(祥祭)와 담제를 숙녕전이 아닌 이국 땅에서 지냈다. 1645년(인조 23)에 소현세자가 죽어 숙녕전의 의례는 왕세자로 책봉된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맡아 거행하였다.

인조를 부묘하기 하루 전날인 1651년(효종 2) 7월 6일에 인열왕후의 신주를 숙녕전에서 받들어 내어 태묘로 나아왔고, 다음 날 인조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였다. 따라서 숙녕전은 인열왕후의 신주를 봉안한 1636년(인조 14)부터 인조의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651년 7월 7일까지 설치되었다.

변천

숙녕전이었던 경덕궁의 전각은 고종대까지 존속되다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참고문헌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 이현진, 「인조대 丙子胡亂 직후 종묘의 정비―神主의 改造·改題 논의를 중심으로―」, 『朝鮮時代史學報』6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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