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전(永思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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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있던 인조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은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영사전은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의 혼전이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후일 원종(元宗)으로 추존되는 정원군(定遠君)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영사(永思)’로 정하고(『효종실록』 즉위년 5월 15일), 5개월 뒤 장릉(長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11실에 부묘할 때까지 영사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649년(인조 27) 5월 8일 인조가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빈전(殯殿)을 어디에 마련하였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5개월 뒤 9월에 장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효종실록』 즉위년 9월 21일). 이때 창경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영사전이다.

인조의 혼전은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에 마련하였다. 『인조빈전혼전도감의궤(仁祖殯殿魂殿都監儀軌)』에는 ‘창덕궁’ 문정전으로 기록되었고,『증보문헌비고』에는 창덕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한 동안 영사전은 인조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일반적으로 능에 장례를 치른 날 우주(虞主)를 받들고 궁으로 돌아와 혼전에서 초우제(初虞祭)를 지낸다. 인조의 경우는 능에서 장사지내고 산릉에서 초우제와 재우제(再虞祭)를 지낸 뒤 삼우제(三虞祭)부터 영사전에서 거행하였다. 영사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일반적으로 혼전에서 거행하는 의식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 의절을 모두 영사전에서 거행하였다. 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를 지냈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혼전에서 거행하는 의식 중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에서 내린 제사와 시호를 받고 분황(焚黃)하는 의식을 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조대에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중원의 주인이 바뀌면서 청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혼전에서 ‘조제(弔祭)’를 거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인조의 국상에 처음으로 청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해 영사전에서 ‘조제(弔祭)’를 행하였다.

부묘하기 하루 전날인 1651년(효종 2) 7월 6일에 인조보다 먼저 승하했던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신주를 숙녕전(肅寧殿)에서 태묘로 나아오게 한 뒤 다음 날인 7월 7일에 인조와 함께 부묘하였다. 따라서 영사전은 인조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649년 9월 21일부터 종묘에 부묘한 1651년 7월 7일까지 창경궁의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사전이 있었던 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된 전각이다.

참고문헌

  • 『인조빈전혼전도감의궤(仁祖殯殿魂殿都監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일지사, 2008.
  • 정옥자 외,『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 이현진, 「명·청의 賜祭·賜諡에 대한 조선의 대응」, 『朝鮮時代史學報』6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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