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涼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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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의 챙에 해당하는 둥근 테 부분.

개설

양대는 주로 제주도에서 생산되었으며 개성·안성 등지에서도 생산되었다. 양대로 만드는 갓은 조선시대 남성의 생활필수품으로서 없어서는 안 될 품목이었다. 본래 양대의 무역에는 양대전(凉臺廛)이 중간상인으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9세기부터 개성상인(開城商人)이 성장하면서 양대의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갓은 조선시대 성인 남자가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자 중 하나였다. 갓은 챙에 해당하는 양대와 갓의 위 둥근 부분인 총모로 나뉜다.

갓을 만드는 작업은 크게 3단계로 나뉘었다. 첫째, 대나무를 잘게 쪼개 만든 가는 실로 레코드판처럼 만드는 작업(양대), 둘째, 말총을 엮어 총모를 만드는 작업, 셋째, 이 둘을 합쳐 명주를 입히고 옻칠로 완성하는 작업이었다. 이 3가지 과정은 서로 재료가 다르고 솜씨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보통 생산지를 달리하여 따로 진행되었다.

갓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필수품이고, 그만큼 상품성이 높았다. 갓의 두 요소인 양대와 총모는 모두 제주도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며, 육지에서 생산되는 곡식과 교역되는 중요한 상품이었다(『정조실록』 10년 10월 5일). 양대가 육지로 반출될 때는 주로 강진과 해남 등지를 거쳤으므로, 이곳은 양대의 집산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중간상인을 거쳐 서울의 양대전으로 전매(專賣)되었다. 양대전은 양대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시전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엽이 되면 개성상인들이 강진과 해남 등지로 진출하여 제주도에서 건너오는 양대를 매점(買占)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전국의 각 도시에 직접 전매하여 서울의 양대전은 상품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성상인의 양대도고(都庫) 행위는 차차 그 상품이 북상하는 길을 따라 그것이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이나 기타 중요 상업 도시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즉, 개성상인들은 해남·강진 이외에 개성·안성과 같은 곳에서도 양대를 매점한 것이었다. 이는 제주 지역 양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양대가 서울로 운반되는 것을, 그 주요 관문이던 안성이나 개성에서 매점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전과 같은 관상도고를 대신해서 개성상인과 같은 상인들이 점차 유통계를 장악해 가고 있음을 보이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변천

갓 중에서 양대는 늘 일정한 크기가 아니었고, 유행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졌다. 광해군대에는 큰 갓이 유행하다가 숙종대에는 다시 좁아졌다. 영·정조대를 거쳐 순조대에는 역사상 가장 넓어 지름이 70~80cm에 이르기도 하였다.

1884년 의제개혁 때 간소화 규정에 따라 역사상 가장 좁게 만들어졌다가 개화와 함께 소멸하였다.

참고문헌

  •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4.
  • 정형지, 「조선 후기 교제창의 설치와 운영: 18세기 나리포창 사례를 중심으로」, 『이대사원』 28,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