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결(實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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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해를 입지 않고 실질적인 경작이 이루어져 전세를 수취할 수 있는 경작지.

개설

조선전기에는 모든 토지에서 풍흉의 정도에 따라 세액을 조정하여 전세를 수취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내내 전세가 점차 하향 고정화되어 갔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정부의 토지 파악력이 크게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전세 수취 방식을 대신하여 영정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영정법은 세액을 결당 4두(斗) 내지 6두로 고정하고, 재해를 입지 않은 토지에 한해서만 전세를 내도록 한 제도였다. 이때 재해를 입지 않아 정상적인 세금을 부담할 수 있는 토지를 출세실결, 즉 실결이라 불렀다. 이후 전세 부과에서는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 기재된 원장부 결수 외에 실제 세를 부담할 수 있는 실결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자연재해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재상전(災傷田)은 실결에서 제외되었으며 세가 면제된 면세전 역시 실결에서 제외되었다. 1730년경부터는 그해 풍흉(풍년과 흉년) 정도와 비슷했던 해의 출세실결 수에 따라 세액의 총액을 일괄 부과하는 비총제(比總制)가 시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영조대에 편찬된 『속대전』상의 전세 부과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경차관을 파견하여 각 지역의 풍흉 정도를 파악한 후에, 작황에 따라 국가에서 각 군현별로 재상전의 액수를 하달하는 방식을 거쳤다. 즉, 각 지역에서 세를 거둘 수 있는 토지, 즉 실결수를 중앙에서 결정하여 지역에 하달하면, 이에 근거하여 각 지역에서는 실결에 따른 전세 액수를 중앙에 상납하는 방식이었다(『영조실록』 즉위년 12월 13일).

『탁지전부고(度支田賦考)』에는 18~19세기 동안 전국에 걸쳐 양안에 기재된 원장부 결수와 실결수가 나열되어 있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실결 수의 비중이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남(三南) 지역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경우 50~60% 이상이 실결인 반면, 강원도와 같은 경우는 30% 미만에 그치기도 하였다. 한편 19세기에 이르면 전체 실결수의 비중이 줄어들었다.

변천

1730년경부터는 경차관을 파견하여 매년 실결수를 산정하는 것이 폐지되고, 그해의 풍흉과 비슷했던 해의 세액을 각 군현별로 일괄 부과하는 비총제가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지역의 실결수도 점차 고정화되어 가는 경향을 보였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이철성, 『17·18세기 전정 운영론과 전세 제도 연구』, 선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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