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사(順天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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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중국 사신들의 숙소인 순천관에 속해 있던 사찰로, 조선초기에 오부학당 중 동부학당이 설치되었던 개성의 절.

개설

순천사(順天寺)는 고려 현종대에 창건되었으며, 당시 송의 사절단이 머물렀던 개성의 순천관(順天館)에 붙어 있었다. 송에서 사절단이 방문할 때면 이 절의 승려들이 사절단을 위해 범패(梵唄)를 불렀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아직 국가의 교육 기관인 학당이 자리 잡지 못해 이 절을 서부학당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찬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의하면 송의 사절단이 묵는 관사였던 순천관 북쪽에 작은 집 수십칸이 있는데 ‘순천사’라는 편액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사절단이 관사에 머문 한 달 동안 순천사의 승려들이 계속 범패를 불렀으며, 방에는 사신단 일행의 태평함과 안락을 기원한다는 글이 붙어 있었다. 순천관은 원래 고려 왕실의 별궁이었는데, 송의 사신이 고려를 방문할 때에 접대할 곳이 마땅치 않아 별궁을 고쳐서 관사로 삼고 순천관으로 명명하였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찬술한 이규보(李奎報)는 순천사를 중창하고 개최한 법회를 축하하는 글에서 "토목(土木)의 공력을 더하고, 모든 외관을 다시 아름답게 꾸미니 겹처마가 첩첩으로 연이었고, 높은 기둥이 훨훨 나는 듯하며, 당번(幢幡)과 종, 경쇠의 장엄함과 화려한 단청까지 갖가지 다 갖추어져 낱낱이 아름다움을 이루었다."고 묘사했다. 그 규모와 경관이 장대하고 화려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변천

조선초기의 순천사는 잠시 학당으로 사용되었다. 고려후기 원종대에 고려 정부는 개경의 동쪽과 서쪽에 동서학당이라는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유학 진흥책의 일환으로 설립한 학교였으나 몽고항쟁 등의 여파로 크게 발전을 이루지는 못한 채 유지되었다. 이후 점차 유교가 성하게 되면서 개경의 각부에 학당을 세워 오부학당(五部學堂)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서울을 동·서·중·남·북의 5부로 나누고 여기에 각각 학교를 하나씩 세우기로 하여 오부학당이라 하였다. 그러나 개국 직후라서 국가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초기에는 학당의 건물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임시로 사찰의 건물을 빌어서 사용하였다. 즉 동부학당은 순천사를, 서부학당은 미륵사를 이용하였다(『정종실록』 2년 8월 21일).

참고문헌

  • 『고려도경(高麗圖經)』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文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