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림굴(小琳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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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소림사의 옛 이름으로, 조선시대 수륙재가 있을 때 초막을 쳤던 곳.

개설

소림굴(小琳窟)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소재한 소림사(小林寺)를 가리킨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달마 대사가 수행했던 소림사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조선전기에는 인근에 있던 장의사(莊義寺)에서 수륙재(水陸齋)를 설행하였다. 장의사가 연산군대에 폐사되었기 때문에 1606년(선조 39) 탕춘대 근처에서 수륙재를 설행할 때 소림굴에 초막(草幕)을 쳤다.

내용 및 특징

소림굴은 1396년(태조 5)에 승려 혜철(慧哲)이 태조의 도움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 명확하지 않다. 소림굴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사찰 경내에 좌선하기에 좋은 바위굴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6세기경 달마(達磨) 대사(大師)가 중국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의 바위굴에서 수행했다는 고사(古事)에서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달마 대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중국 선종은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 혜능(慧能)을 거치며 크게 발전하였다.

소림굴과 관련한 기록은 조선시대부터 나온다. 1539년(중종 34) 5월에 어떤 승려가 궁궐에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은수(誾修)라는 법명을 가진 승려가 궁성(宮城)을 넘었다가 후원(後苑)에서 붙잡힌 것이다(『중종실록』 34년 5월 20일).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인근의 정수암(淨水菴)·승가사(僧伽寺)·소림굴의 승려들을 데려와 은수와 대면시켰다. 이때 소림굴에서 두 명의 승려가 왔다고(『중종실록』34년 5월 20일) 하였다. 며칠 후 은수는 끝내 형신(刑訊)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었다.

또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6년 5월 28일에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蕩春臺) 근처에서 수륙재를 베풀 때 소림굴에 초막을 지었다고(『선조실록』39년 6월 1일) 한다. 당시 승려 4명과 거사(居士)들이 주도하여 수륙재를 베풀었는데, 도성의 남녀들이 가게 문을 닫고 도성을 넘어 달려갔다고 한다. 이때 승속(僧俗) 10여 명이 체포되었다(『선조실록』39년 6월 1일). 소림굴에 초막을 쳤던 것은 소림굴이 탕춘대와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죽은 중생의 영혼을 위로하는 불교 의식으로서 고려시대 이후 설행되었다. 조선 태조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왕족들을 참살한 후에 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수륙재를 설행하였고, 그 이후 왕실에서 자주 수륙재를 설행하였다. 조선전기 수륙재는 전국 여러 사찰에서 설행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찰은 서울 진관사(津寬寺)·봉은사(奉恩寺)·장의사(莊義寺)·정인사(正因寺)와 양주 봉선사(奉先寺)·거창 견암사(見巖寺)·강릉 삼화사(三和寺)·영동 영국사(寧國寺) 등이다. 이 가운데 연산군대에 폐사된 장의사는 현재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므로 소림굴과는 지척 거리에 있었다. 아마도 당시 수륙재가 탕춘대 근처에서 설행되고 소림굴에 초막을 쳤던 것은 조선전기 장의사에서 설행했던 수륙재 전통과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소림굴은 1817년(순조 17)에 승려 관해(觀海)가 중건하면서 소림사라고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1913년에 승려 두삼(斗三)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강호선, 「고려시대 수륙재의 전개와 공민왕대 국행수륙재 설행의 의미」, 『불교학연구』38, 불교학연구회, 2013.
  • 한상길, 「조선전기 수륙재 설행의 사회적 의미」, 『한국선학』23, 한국선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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