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포(神稅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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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무속과 관련하여 세금으로 징수하는 베.

내용

함경도와 강원도에서는 무속 의례를 할 때 신에게 베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바친 베의 일부를 국가에서 징수하면서 시작된 것이 신세포(神稅布)이다. 언제부터 신세포를 징수했는지 알 수 없지만 1401년(태종 1)에 이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조선초기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속을 음사(淫祀)로 규정했던 조선조에 들어와 무속을 억제한다는 명분으로 계속된 것이었다.

신세포는 처음에는 무당의 부담이었던 것 같으나, 언제부터인가 함경도와 강원도의 일반 민호(民戶)로부터 징수했다. 처음에는 무속 의례에서 실제 사용되었던 베를 징수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종이나 돗자리 또는 실이나 삼으로 납부하는 것도 허용했으나, 이것 역시 매년 민호 당 길이가 35척인 베 1필씩으로 규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징수된 신세포의 1/3은 해당 고을의 수령에게, 1/3은 감사에게 지급되었으며, 나머지 1/3은 국가에 바쳤다. 국가분의 신세포는 진상품을 담당하는 제용감(濟用監)에 바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초피(貂皮)와 같은 진상품의 구입, 국방비, 의창의 자본금, 백성들의 구휼비 등으로 전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세포는 다른 도에는 없는 세금이었고,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폐단이 있었다. 더구나 철원의 경우 베를 바치는 풍속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면서 신세포를 납부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신포세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있어, 신포세 징수 대상에서 가난한 잔잔호(殘殘戶)나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 등은 제외한다거나 도별 징수액을 감면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예컨대 1426년(세종 8) 함경도의 2,500필과 강원도의 2,000필을 모두 1,000필로 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세포는 국가 재정의 일부를 담당했으며, 지방관의 입장에서는 관아의 운영비로 비교적 융통성 있게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징수되었다. 그 결과 신세포 징수는 무속 탄압이란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오히려 무속을 조장하는 것이 되었다. 이에 신세포 폐지는 성종 연간부터 논의가 일기 시작했고, 마침내 1517년(중종 12) 함경북도평사(咸鏡北道評事)유옥의 상소를 계기로 공론화되어 징수가 중지되었다.

용례

李明德言 江原神稅布之貢 其弊不少 非獨取於巫戶 亦取於平民之戶 果若此言 雖祖宗之法 革之如何(『세종실록』 7년 7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