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사(法華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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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간섭기에 일본 정벌의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있던 절.

개설

법화사(法華寺)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절이다.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되었으며, 고려후기에는 원나라가 일본 정벌의 전초 기지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법화사에는 당시 원나라의 양공(良工)이 주조한 아미타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조선 태종대에 명나라의 사신이 이 금동불상 3좌(座)를 가져갔다.

내용 및 특징

법화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장보고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왕실의 융성을 기원했던 비보사찰(裨補寺刹)이었다. 고려시대 원나라의 간섭기였던 1269년(고려 원종 10)부터 1279년(고려 충렬왕 5)까지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당시 원나라의 장인이 구리로 주조한 아미타삼존불 3좌가 안치되어 있었다. 이후 조선시대 들어서 1406년(태종 6)에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이 이 불상을 가져가고자 하였다(『태종실록』 6년 4월 20일).

태종은 황엄의 방문이 제주의 형세를 염탐하기 위한 것이라는 신료들의 말을 듣고는 법화사의 불상을 미리 옮겨왔다. 왕명을 전하기 위해 임시로 선발한 선차(宣差) 김도생(金道生)과 5위(五衛)에 속하는 정5품의 무관직(武官職)인 사직(司直)박모(朴模)를 보내 법화사의 불상을 황엄보다 먼저 가져오게 한 것이다. 불상을 전라도 나주(羅州)에 먼저 가져다 놓으면 황엄 등이 제주에 들어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태종실록』 6년 4월 20일). 이에 김도생과 박모는 도성을 떠나 17일이나 걸려 삼존불을 모셔와 황엄에게 전달했다(『태종실록』 6년 7월 16일).

변천

조선초까지만 해도 법화사는 매우 큰 사찰이었으나, 태종대의 불교 억제 정책에 의해 크게 축소되었다. 1408년(태종 8) 제주목사가 올린 보고에 따르면 이전까지 법화사에는 노비 280구가 있었는데 30구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전농시에 귀속되었다(『태종실록』 8년 2월 28일). 이후 법화사는 계속 퇴락해서 16세기 후반에는 폐사되었다. 이후 17세기에 초가 암자 몇 채가 지어져 사찰의 명맥을 유지해 갔으나 18세기에는 그것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법화사는 근대 이후에도 수차례 복원과 폐사를 반복하였다. 1926년 제주 관음사의 포교당으로 중창이 되었다가 1948년 제주4·3사건이 발발한 후 토벌대에 의해 전소되었다. 1950년에 다시 법당과 요사 등을 지었는데 한국전쟁 발발 이후 육군의 제3숙영지로 사용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고, 1987년에 대웅전이 중창되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이정 편저,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