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근당(付根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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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과 관아 내에서 설치된 신당. 부군당(府君堂, 符君堂, 附君堂)이라고도 하며, 단순히 신당이라고도 한다.

개설

조선시대 관아에는 부근당(付根堂)이란 신당을 두어 해당 관아의 평안을 빌었다.

위치

조선시대에는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관아 내에 부근당이 있었으며, 심지어 창덕궁과 같은 궁궐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된다. 부근당은 독립된 기와 건물이며, 대체로 관아 구내의 북쪽 구석진 곳에 위치했다. 관청에 따라 모시는 부근신은 달랐다. 즉 송씨부인이나 처녀귀신인 송씨처녀 같은 여성도 있고, 왕이나 장군 같은 남성신도 있었다. 그리고 남성신에는 동명왕·공민왕 같은 왕신, 최영·임경업 같은 장군신, 심지어 제갈량이나 문천상(文天祥) 같은 중국인도 있었다.

변천

부근신에 대해서는 각 관청에서 정기적으로 의례를 거행했는데, 현재 확인되는 바로는 10월이 많고, 관아에 따라서는 정월 또는 3~4월도 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수시로 의례를 거행했을 것임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부근신에 대한 의례는 해당 관청의 이서(吏胥)들이 무당을 동원하여 지내는 축제 형식이었으며, 의례의 목적은 관아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 중에는 송씨부인이나 송씨처녀가 부근신인 점이나 남자 성기 모형을 바친 점과 부임 첫날 신관 사또가 비명횡사했다는 아랑형 원귀 설화로 미루어, 관아의 신을 달래는 의례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서들 뿐 만이 아니라 사족 출신의 관리도 새로 부임하면 부근당에 가서 일종의 신고식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재임 기간 동안 부근신의 가호를 빌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또 의금부의 경우는 죄수들이 나무를 깎아 남자 성기 모형을 만들어 부근신에게 복을 빌었다고 한다.

부근당에 대해서는 상고시대 광명 숭배 즉  숭배에서 기원했다는 설, 성기 숭배에서 기원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렇다면 부근당은 정치와 종교가 미분화되었던 시기의 유제로서, 조선시대 이전부터 관아에 설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어효첨(魚孝瞻)이 거쳐 간 관청의 부근당을 모두 없앴다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부근당은 조선조의 유교 이념과는 배치되는 신앙이므로 어효첨과 같은 유학으로 무장된 관리들이 나서서 이를 철폐하거나, 사헌부 같은 특정 부서가 부근당 철폐를 발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왕조를 통하여 부근당을 공식적으로 철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낡았을 경우에는 중건을 했으며, 사역원의 부근당처럼 1707년(숙종 33) 중건하면서 원래보다 규모를 더 늘린 예도 있다. 부근당은 조선 왕조 말기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나, 1898년(광무 2) 무렵 모두 철폐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소속 관원들이 신벌을 두려워하여 감히 철폐하는 데 나서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조선시대를 통하여 부근신앙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형태

2칸 전후의 기와 건물이 많고, 내부에는 부근신의 신상을 모셔 두었으며, 벽에는 길쭉하게 찢은 종이로 다발을 만들어 엽전이 달린 것처럼 만든 무속의 도구인 지전(紙錢)이나 나무로 만든 남자 성기 모형을 주렁주렁 걸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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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

부근당 신앙은 민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관아 부근당의 일부는 관아가 없어진 이후에도 민간신앙의 신당으로 명맥을 유지하거나, 마을 제당의 명칭으로 부근당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현재 서울, 그 중에서도 특히 한강변에 위치한 마을 제당의 명칭에 부근당이 많은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참고문헌

  • 이능화, 서영대 역, 『조선무속고』, 창비사, 2008.
  • 이능화, 『朝鮮宗敎史』, 영신아카데미 한국학연구소, 1983.
  • 김태우, 「서울 한강유역 부군당 의례 연구」, 경희대 박사학위논문, 2008.
  • 오문선, 「서울 부군당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