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혜청정례(宣惠廳定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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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 중반에 지출례인 횡간을 보완하기 위하여 편찬된 정례서의 한 종류.

개설

영조는 재위 20년에 들어서 국가의 의(儀)·전(典)·예(例)를 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744년(영조 20)에는 『속오례의(續五禮儀)』를 편찬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는 『속대전(續大典)』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1749년(영조 25)부터는 지출례(支出例)인 횡간(橫看)을 보완하는 거질의 『탁지정례(度支定例)』를 편찬하였다. 정례서(定例書)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영조는 그동안 왕실과 중앙 관서에서 경비 물자를 남용하거나 쓸데없이 지출하는 부분을 찾아내어 각(各) 전(殿)·궁(宮)별, 관서별로 지출 물품을 정비함으로써 지출 증대가 누적되는 상황을 예방하는 한편, 정례를 준거로 지출 구조를 일원적으로 통제하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선혜청정례』는 『탁지정례』 로 편찬된 『각전각궁례(各殿各宮例)』·『국혼정례(國婚定例)』·『상방정례(尙方定例)』·『각사정례(各司定例)』 중 왕실의 공상례(供上例)에 해당하는 『각전각궁례』와 짝을 이루는 정례서였다. 왕을 비롯한 궐내 왕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바치는 생활 물자를 『각전각궁례』와 『선혜청정례』에 각각 나누어 기재해 놓았다. 영조는 1749년에 『각전각궁례』를 편찬한 후에 1750년(영조 26)부터 『선혜청정례』를 수정하도록 지시하여 1752년(영조 28)에 최종 수정하여 간행하였다(『영조실록』 26년 1월 6일).

내용 및 특징

『선혜청정례』는 『각전각궁례』와 마찬가지로 왕을 필두로 왕대비[慈殿]와 왕비[中宮殿] 이하 봉보부인(奉保夫人)에 이르기까지 총 19처의 왕실 구성원에게 바치는 공상(供上) 물자를 정리해 놓았다. 『선혜청정례』의 편재 방식은 『각전각궁례』와 거의 동일한 형식을 띠었다. 다만 『선혜청정례』에는 『각전각궁례』에 없는 공상 물자의 단가(單價)와 각 전·궁별 공상가(供上價) 총액을 기재해 놓았다. 선혜청은 대동세를 거두어서 공인들에게 공물가로 지급하는 재무 관서였기 때문에 『선혜청정례』에는 『탁지정례』와 달리 값을 기재해 놓은 것이 특징이었다. 왕실 공상에 관련된 제반 물품은 선혜청에서 재원을 조달하여 마련하였다.

그런데 영조가 『각전각궁례』를 간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선혜청정례』를 편찬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는 같은 시기에 추진된 균역법(均役法)과 관련이 깊다. 균역법은 양인 장정[良丁]에게 부과된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해 주는[減匹] 대신 결전(結錢)과 어염선세(魚鹽船稅)·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등을 거두어들여 군문과 여타의 관서에 급대(給代)해 주던 조치를 말하였다.

영조는 『선혜청정례』의 서문에서 “오늘날 백성을 위하여 감포(減布)한 후 포 1척과 곡식 1되를 아껴 쓴 후에야 국가가 명맥을 이을 수 있고, 신뢰가 이어질 수 있다. 아! 균역청을 설립한 후에 한결같이 모두 말하기를 구차하다고 하나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왜인가 하면 이것은 도신, 수신의 사물(私物)이 아니라 곧 공물(公物)이어서이다.”라고 하여 『선혜청정례』의 간행이 균역법 시행과 관련을 맺고 있음을 시사하였다.

영조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조치 이후 군문을 비롯한 중앙 관서의 반발과 재정 부족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재정 절용을 몸소 실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왕실의 공상을 두 차례 이정하는 작업을 지시한 것이다. 그런데 『선혜청정례』에 수록된 물품은 『각전각궁례』와 달리, 왕실에 예를 표하는 진상(進上) 물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영조는 『선혜청정례』의 간행을 통해 왕실의 위엄을 받드는 물품을 스스로 줄임으로써 ‘익하지정(益下之政)’, 즉 아랫사람을 이익 되게 하는 정치를 표방하고 감필의 명분을 얻는 정치적 효과를 거두었다.

변천

『선혜청정례』는 『탁지정례』와 함께 19세기까지 중앙 경비의 지출례로 계속 활용되었다. 특히 『선혜청정례』는 대동법 시행 이후 각 도에서 현물로 봉진(封進)하던 진상 물자를 시중에서 조달해 쓰게 되는 경향을 파악하기에 좋은 자료였다.

영조대 『탁지정례』와 『선혜청정례』의 편찬은 정조대에 각 도의 현물진상을 이정한 『공선정례(貢膳定例)』로 이어졌으며, 이로써 왕실과 정부 관서에서 소비하는 각종 경비가 18세기 말까지 계속 정비되어 갔다.

참고문헌

  • 『탁지정례(度支定例)』
  • 『선혜청정례(宣惠廳定例)』
  • 최주희, 「18세기 중반 定例類에 나타난 王室供上의 범위와 성격」, 『장서각』 27, 2012.
  • 최주희, 「영조대 중반 균역법 시행논의와 『宣惠廳定例』의 간행」, 『한국사연구』 16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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