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패노비(賜牌奴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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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국가에서 공신이나 관직 등으로 공로를 세운 이에게 하사한 노비.

개설

사패노비(賜牌奴婢)는 공신이 되거나 관직 등으로 국가에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 그 대가로 하사한 노비이다. 사패전지(賜牌田地)와 달리 사패노비는 자손 대대로 상속시킬 수 있었으나, 공노비를 지급하였으므로 공노비의 사노비화가 문제로 부각되었다.

내용 및 특징

사패노비는 은사노비(恩賜奴婢)라고도 칭하며 받는 사람을 기준으로 수사노비(受賜奴婢)로도 부른다. 조선전기에 여러 차례 공신이 녹훈되었는데 이때마다 사패노비가 지급되었다. 사패노비와 함께 공신전(功臣田)도 지급되었으므로 사패전민(賜牌田民) 또는 수사전민(受賜田民) 등 다양하게 지칭되었다.

그런데 법전에서 사패전과 사패노비의 규모를 규정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공신을 녹훈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녹훈된 이의 명단과 어느 정도 규모의 사패전민이 책정되었는지 밝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법정 규모가 별도로 정해져 있지는 않고 공신을 녹훈할 때마다 다르게 준 것으로 보인다.

양반가의 분재기 중에 공신 사패노비를 거론한 사례가 있는데, 세조대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공신에 책봉된 장말손(張末孫)과, 또 동일한 적개공신 손소(孫昭)의 사례이다. 이들은 모두 적개공신 2등으로 책봉되었는데, 노비 10명과 전(田) 100결(結)을 하사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말손의 점련입안문기(粘連立案文記)와 손소 집안의 분재기에 공신 사패노비가 기록되어 있다. 다만 노비만 나올 뿐 사패전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노비와 달리 토지는 수조권(收租權)만 지급되었기 때문에 상속 대상이 되지 못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변천

사패노비는 국가에 공훈을 세운 이에게 준다는 점에서 사패노비를 받은 가문에서는 이를 매우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러나 국가가 공노비를 개인에게 지급하여 사노비화 했다는 점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 이와 함께 숙종대 이후 궁가(宮家)나 훈신(勳臣) 집안에서 사패노비를 강제로 속량(贖良)시키면서 속신가(贖身價)를 높게 징수하는 사례가 사회 문제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김용만, 『조선시대 사노비 연구』, 집문당, 1997.
  • 안승준, 『조선 전기 사노비의 사회 경제적 성격』, 경인문화사, 2007.
  • 전형택, 『조선 후기 노비 신분 연구』, 일조각,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