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산공물(不産貢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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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데도 분정하는 공물.

개설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은 임토작공(任土作貢)의 원칙에 따라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이어야 하였다. 그런데 공물을 특산물의 산출 지역에만 분정하면 해당 지역만 집중적으로 수탈을 당하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산출되지 않는 공물도 분정하였다. 강원도 평강 등지의 종이, 제주의 철, 강릉의 활[角弓]·화살[長箭], 갑산의 꿀, 강원도의 대구어, 황해도의 저주지(楮注紙)는 원래 그 지방 산물이 아니었다. 또한 각 군현에 분정된 공물 중에는 과거에 그 지방에서 산출되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양이 줄거나 더 이상 나지 않게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함길도 6진에는 담비 가죽[貂鼠皮]이 공물로 분정되었지만, 성종 초년에 이르러 그 산물이 적어지자 그 지역 백성은 오로지 여진과 무역하여 이를 납부하였다(『성종실록』 22년 2월 25일). 특히 연산군대에는 6진에 초피를 많이 분정하였는데, 이곳 백성들은 담비 가죽을 구할 길이 없었다. 야인은 우리 백성들이 담비 가죽을 사야 된다는 절실함을 알고 항상 이를 준비하였고, 매매할 때 그 값으로 소와 말[牛馬], 철물(鐵物)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우리 백성들은 말 혹은 소 한 마리로 담비 가죽 1장을 바꾸기도 하였다. 백성들이 마을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유망(流亡)이 6진에서 끊이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전라도 해변 여러 고을의 공물로는 제호유(鵜鶘油)가 있었다. 제호유는 사다새의 기름으로, 사다새는 토산물이 아니어서 해변 7읍이 돌아가면서 해마다 1마리를 상납하였다. 그런데 중종 무렵부터 이 새가 전혀 날아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차례가 된 읍에서는 민간에서 높은 값을 거둔 다음 멀리 평안도까지 가서 구매하거나 혹은 경상(京商)에게 구입하여 상납하였다.

변천

불산공물은 그 공물이 산출되는 산지에 가서 높은 값으로 구입하여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해당 군현의 백성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이에 대한 개정 논의는 세종대 이후 수차례에 걸쳐 있었지만 별다른 대책이 마련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불산공물의 분정은 방납을 촉진하는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 강제훈, 「조선 세조대의 공물대납정책」, 『조선시대사학보』 36, 2006.
  • 김진봉, 「조선초기의 공물대납제」, 『사학연구』 22, 1973.
  • 김진봉, 「조선초기의 공물방납에 대하여」, 『사학연구』 26, 1975.
  • 박도식, 「조선전기 공물방납의 변천」, 『경희사학』 19, 1995.
  • 박평식, 「조선전기의 주인층과 유통체계」, 『역사교육』 제82집, 2002.
  • 백승철, 「16세기 부상대고의 성장과 상업활동」, 『역사와 현실』 13, 1994.
  •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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