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평염(常平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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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당나라 때 유안이 시행했던 소금 전매제 방식 중 하나.

개설

중국당나라 때에 정부가 소금을 생산하는 지역에 관리를 두고 생산된 소금을 거둬서, 다시 이를 소금이 귀한 내륙지방까지 운반하여 저장해 두었다가 소금 상인이 끊어져서 소금 값이 오르면 시가보다 싼값에 상인들에게 소금을 판매하였다. 이렇게 소금을 관리·운영하는 방식이 상평(常平)의 원리와 같았기 때문에 상평염이라고 불렸다.

내용 및 특징

당나라 때 유안(劉晏)은 처음에 통상법이는 방식으로 소금 전매제를 시행하였다. 통상법이란 소금이 생산되는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소금 생산자인 염호(鹽戶)가 생산한 소금을 거두어 그곳에서 소금상인에게 판매하고, 소금을 사들인 상인은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소금을 판매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하였다. 즉, 상인이 소금의 운반과 판매를 담당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소금 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은 운송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이윤이 많지 않아 상인들이 소금을 운반하여 판매하려고 하지 않았다. 유안은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관에서 자금을 대어 소금 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까지 소금을 운반하여 저장해 두었다가, 소금이 귀해서 가격이 오르면 시가보다 싼 가격에 소금을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것이 상평염이라고 불리던 제도이고, 국가 재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조선에서의 상평염 이해

조선은 본래 소금 전매제 시행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 재정 측면에서는 소금의 생산과 유통에서 얻게 되는 이윤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였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유안이 시행했던 상평염제였다. 조선건국 초기만 해도 상평염조차 소금 전매제로 이해하고, ‘국가가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제도라고 파악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전쟁과 흉년 등으로 재정 수요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소금에서 얻게 되는 이윤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소금 전매제라는 혐의를 피하고, 소금 공급을 원활하게 하고 내륙지방의 소금 값을 낮게 유지하여 국가와 백성 모두에게 이로운 정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상평염제를 시행하였다. 그것이 선조와 광해군대 시행한 염철사(鹽鐵使)·염철조도사(鹽鐵調度使) 운영제였다. 그러나 이 제도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었고, 결국 소금 전매제와 다르지 않다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래서 정부에서 상평염제를 활용하려는 시도는 마침내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 조선에서는 상평염제도를 소금 전매제와는 무관하게 이해하였다. 염분세로 얻은 소금을 상평의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경세유표(經世遺表)』
  • 박평식, 『조선전기 상업사연구』, 지식산업사, 1999.
  • 佐伯富, 『中國鹽政史の硏究』, 法律文化社, 1987.
  • 이수건, 「서애 류성룡의 사회경제관」, 『대구사학』 12·13, 대구사학회, 1977.
  • 이욱, 「16·17세기 ‘소금專賣制’ 시행론과 性格」, 『조선시대사학보』 21, 조선시대사학회, 2002.
  • 김호종, 「조선후기 염업사연구」,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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