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거(四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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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봉수 제도인 오거화제(五擧火制) 중 병선이 서로 싸우거나 국경을 침범했을 때 네 개의 횃불 또는 연기를 올리는 일.

개설

조선초기 봉수제는 주간은 연기로, 야간은 횃불로 신호를 나타내는 주연야화(晝煙夜火)에 따라 운영하였다. 그러다 1419년(세종 1년)에 병조의 보고에 따라 적변(賊變)의 상황에 따라 거화의 수를 구분하는 오거화제(五擧火制)를 확립하였다. 그중 사거는 병선이 서로 싸울 때나 국경을 침범했을 때, 이를 알리기 위해 네 개의 횃불 또는 연기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오거화제는 1423년(세종 5) 전국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집결하는 경봉수(京烽燧)인 목멱산봉수(木覓山烽燧)의 설치와 더불어 확정되어 1895년(고종 32) 봉수제가 폐지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초기 봉수제는 고려시대의 4거제를 계승하였으나, 이후 2거제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세종 초기인 1419년에 병조의 건의에 의해, 해상과 육지의 적변에 따라 봉화의 수를 오거제로 구분하고 낮에는 연기로 대신하도록 하는 제도를 확정하였다(『세종실록』 1년 5월 26일).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왜적이 해중(海中)에 있으면 재거(再擧), 국경에 이르면 3거(三擧), 병선이 서로 싸울 때는 4거(四擧), 하륙(下陸)하면 5거(五擧)로 표시하였다. 육지에서 적변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국경 밖에 있으면 재거, 국경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맞붙어 싸우게 되면 5거로 나타냈다. 또한 낮에는 연기로 대신하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봉화간(烽火干)이나 관사(官司)는 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4거는 왜적이 바다를 통해 침입했을 때는 병선이 서로 싸운다는 것을, 육지의 경우 국경을 침범했음을 나타내는 약정된 신호임을 알 수 있다.

이후 1423년에는 남산에 5개소의 봉수를 두어 각지에서 봉화를 통해 전달되는 신호를 받도록 하였다(『세종실록』 5년 2월 26일). 또 단종대에는 1419년에 확정한 5거의 거화법을 변경하여 봉화를 적변에 따라 한꺼번에 들도록 하는 개선책을 마련하였다(『단종실록』 2년 11월 8일). 봉졸들의 무지와 시간 차에 의한 착오를 우려한 때문이었다.

한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해상과 육지의 적변을 구분하지 않고 평상시에는 1거, 적이 보이면 2거, 국경에 이르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맞붙어 싸우게 되면 5거로 표시하도록 조정하였다. 이 규정에 따르면 4거는 북쪽의 여진족이나 남쪽의 왜적이 국경을 침범했을 때, 이를 나타내는 신호로 횃불이나 연기를 네 번 올리는 일을 말한다.

변천

1485년(성종 16)에 반포한 『경국대전』에 의해 공식적으로 규정된 봉수제는 이후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에 의해 철폐될 때까지 국가의 핵심 통신 제도로서 운영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주홍, 『조선시대 봉수연구』, 서경문화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