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세(山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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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잡세(雜稅)의 하나로, 나무 1그루마다 정해진 세율에 따라 징수하던 세.

개설

고려중기 이후 국가 재정이 악화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조세 명목이 생겨났다. 산세(山稅)는 그중 하나로, 1088년(선종 5)에 신설되었다. 이때 산에 있는 모든 나무는 나무의 크기나 종류에 따라 세율을 다르게 정하여 징수하였다.

내용 및 특징

1088년(선종 5)에 정해진 세율을 보면 밤나무와 잣나무 큰 것은 각각 밤과 잣 3되, 중간 것은 2되, 작은 것은 1되로 하였고, 옻나무는 옻액 1되씩 징수하였다. 이를 보아 밤나무·잣나무를 비롯한 각종 과실수 열매와 옻나무에서 수확되는 옻액은 세목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과실수가 이러한 산세의 부과 대상이었는지, 또 밤나무 1그루에서 거두는 1되에서 3되에 이루는 수취액이 총 생산량 중 어느 정도 비중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조선초기 집터인 가대지(家垈地)의 과실수에 대해서는 산세가 면제되었고, 그 세율이 생산량의 1/10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서 고려시대에도 그 정도의 수취율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여하튼 산세는 충혜왕의 무리한 재정 확보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고, 그 때문에 반발이 많았다. 하지만 국가에서 세원을 확대해 가는 과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변천

고려후기에 산을 소유할 경우 과실과 목재를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생기므로 권세가들이 산을 차지하고, 일반 백성에게 직접 산세를 무겁게 징수하여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이에 1356년(공민왕 5) 산림을 국가기관인 선공시에 귀속시키고 세금을 낮추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조선건국 후에는 정부가 산림에 대해서는 공유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산세를 거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박종진, 『고려시기 재정운영과 조세제도』,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 이정희, 「잡세」, 『한국사』 14 , 국사편찬위원회, 1993.
  • 김선경, 「조선후기 산림천택 사점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 김재명, 「고려잡역제도사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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