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학(算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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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산술을 가르치는 잡학의 하나.

개설

산학(算學)은 십학(十學)의 하나로서 호조에 소속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호조에서 산(算) 자의 발음이 왕의 이름과 같다고 고함에 따라 주학(籌學)으로 개칭하였다.

내용 및 특징

산학은 고려조부터 국가에서 관리한 주요 학문 분야 가운데 하나로 율학(律學)·서학(書學)과 함께 국자감에 배속시켜 익히게 하였다. 식목도감(式目都監)의 ‘학식(學式)’에 따르면 산학의 수업 대상은 8품 이하의 자제와 일반 서인(庶人)이었으며 7품 이상의 자제들도 원하는 경우 허락하였다. 교육은 산학박사(算學博士)가 담당하였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1393년(태조 2)에 산학을 산술을 다루는 학문으로 병학(兵學)·율학(律學)·자학(字學)·역학(譯學)·의학(醫學) 등 육학(六學)의 하나로 설치하여 양가(良家)의 자제들로 익히게 하였다(『태조실록』 2년 10월 27일).

1406년(태종 6)에 유학(儒學)과 함께 무학(武學)·이학(吏學)·역학·음양풍수학(陰陽風水學)·의학·자학(字學)·산학·악학(樂學) 등 십학의 하나로 설치하였다(『태종실록』 6년 11월 15일). 십학 중에서 유학과 무학은 양반들이 입속하였으며, 나머지 8학은 잡학(雜學)이라 하여 기술직 중인층이 담당하였다.

산학은 국학에서 중요한 일로 인식되어 국가의 정책 차원에서 산학 연구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세종은 산학을 예습시킬 방도를 강구하였고 집현전에 명하여 산학을 진흥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하였다(『세종실록』 25년 11월 17일). 세종은 대표적인 산학 서적 중 하나인 『산학계몽(算學啓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산학은 천문역법을 계산하는 기초 지식으로 중시되었다.

조선초에 산학 교육은 호조 소속의 산학박사와 산학중감(算學重監)이 담당하였는데 이들의 출신은 달랐다. 산학박사를 의관자제(衣冠子弟) 중에서 선발하였다면, 산학중감은 각사의 아전 중에서 충당하였다(『세종실록』 5년 11월 15일). 산학 교육은 호조를 중심으로 산법교정소(算法校正所)·역산소(曆算所)·습산국(習算局) 등에서 이루어졌다(『세조실록』 6년 6월 16일). 1466년에 산학을 호조에 귀속시키고 박사는 없애고 종7품 산사(算士) 2명, 종8품 계사(計士) 2명, 정9품 훈도(訓導) 2명, 종9품 회사(會士) 3명을 두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성종대의 기록에서 산학별제·산학교수(算學敎授)·산학훈도(算學訓導) 등의 관직이 보였다(『성종실록』 4년 8월 16일).

『경국대전』에서 산학과 관련된 직제를 보면, 종6품 산학교수 1명, 종6품 별제(別提) 2명, 종7품 산사 1명, 종8품 계사 2명, 정9품 산학훈도 1명, 종9품 회사 2명이 있었다. 산학생도는 15명, 산원(算員)은 30명이었다. 산원 가운데 교수·별제·훈도는 산학 본업인(本業人)을 임명하는 정규직이었다. 종7품 산사 이하는 체아직으로 1년에 2번 도목(都目)할 때 514일을 근무하면 품계를 올려 주되 종6품이 되면 그 직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계속 근무하기를 원하는 자는 그때부터 900일을 근무하면 품계를 올려 주되 정3품 당하관에서 그치게 하였다. 관직을 떠나지 않는 자는 모아서 재능을 시험하여 체아직을 주었다.

산원은 호조에 속하였으며, 호구(戶口)·공부(貢賦)·전량(田粮)·식화(食貨)에 관하여 문무 관료들이 입안한 정사를 맡아 보았다. 그들은 호조 산하의 판적사(版籍司)·회계사(會計司)·경비사(經費司) 등에 배속되었다. 판적사는 호구·토전(土田)·조세·부세(賦稅)·공부(貢賦)·풍흉·진대(賑貸)의 조사, 회계사는 서울과 지방의 관아에서 비축한 물자와 세입·세출의 회계, 경비사는 서울 각 관아의 경비 지출과 조달 등을 담당하였다.

신분으로 보면, 산원은 하급 기술관이었다. 과거시험의 잡과에도 포함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상급 기술관으로서의 잡과중인(雜科中人)에 비해서 사회적 위상이 낮았다. 산원은 취재에 의해서 충원되었으며, 산학 취재 시험 과목은 『상명(詳明)』·『계몽(啓蒙)』·『양휘(楊輝)』 등이었다. 『상명』의 원명은 『상명산법(詳明算法)』으로 『신법상명산법(新刊詳明算法)』과 『상명산법(詳明算法)』이 전해졌다. 『계몽』의 원명은 『산학계몽(算學啓蒙)』으로 조선후기에 주해한 『산학계몽주해(算學啓蒙註解)』와 『신편산학계몽(新編算學啓蒙)』이 있었다. 『양휘』는 『송양휘산법(宋揚輝算法)』과 『양휘산법(揚輝數法)』이 전해졌다.

변천

『속대전』에서는 산학별제가 2명에서 1명으로 정원이 줄고, 산학생도의 정원은 46명이 늘어 61명이 되었다. 『대전통편』에서는 산원의 정원이 26명 늘어 56명이 되었다. 산학의 정원이 늘어난 것은 조선후기에 양전(量田)과 도량형(度量衡)의 정비와 통제가 실시되면서 산원의 수요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대전회통』에서는 종6품 겸교수(兼敎授) 1명이 신설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이남희, 『조선후기 잡과중인 연구』, 이회문화사, 1999.
  • 이성무, 『한국 과거제도사』, 민음사, 1997.
  • 구만옥, 「조선전기의 산학 정책과 교육」, 『인문학연구』 11, 2007.
  • 김대식, 「조선 초 십학 제도의 설치와 변천」, 『아시아교육연구』 12-3, 2011.
  • 이남희, 「조선후기 주학팔세보의 자료적 특성과 의미」, 『고문서연구』 3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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