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국력(本國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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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의 북극고도에 맞는 새로운 계산법으로 만든 역(曆)과 역서(曆書).

개설

조선 세종대에 중국의 역(曆) 계산법에서 벗어나 한양의 북극고도에 맞는 새로운 계산 방법에 따라 만든 역(曆)과 역서(曆書)로, 정확히는 칠정산내편법(七政算內篇法)과 칠정산내편법에 따라 계산한 역서를 가리킨다. 전통시대 천변(天變) 현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식과 월식 현상이었다. 조선초기에는 이미 600년을 넘긴 선명력(宣明曆)을 따르고 있어 역 계산에 오류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중국의 계산법을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에서 벗어나 세종의 주도로 한양의 북극고도에 맞는 새로운 계산 방법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본국력이다.

내용 및 특징

우리나라에서 본국력을 사용한 것은 조선 세종대에 와서였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역법(曆法)은 고려말과 같이 수시력과 명나라의 대통력을 사용하고 일부는 선명력을 썼으나, 1433년(세종 15)에 교식과 오성(五星)만이 역법 계산에 필요한 천문상수인 입성(立成)들을 적어놓은 수표(數表)가 없다 하여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정흠지(鄭欽之) 등에게 추보하게 하고, 명나라원통(元統)이 편찬한 『대통통궤(大統通軌)』에서 오류를 조금 고쳐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편찬하게 했다. 뒤이어 이순지(李純之)·김담(金淡) 등에게 회회력(回回曆)을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교정한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만들게 했다.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국가에서는 천문학을 빌려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는데, 정확한 역법을 확보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조선에서는 역법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고려말에 들어온 수시력, 그전부터 써왔던 선명력, 그리고 고려말에 다시 명나라에서 들어온 대통력까지 섞어 썼으나, 역법 지식은 여전히 고려 말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만큼 역법은 하루아침에 수준이 높아질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정밀한 과학이었다.

조선의 건국과 국가의 정당성을 입증할 유용한 수단이었던 천문학은 국가의 기틀이 잡히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국가적으로 천문학을 중요시하면서 세종 때에는 수시력과 대통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의 경위도에 맞는 새로운 역법을 고안해 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1433년(세종 15) 세종은 신하들에게 명나라의 대통력을 연구해 역법의 원리를 완전히 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역법 연구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한 사람은 이순지와 김담이었다. 이들은 실제 관측을 행하고 역법의 원리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를 수행하면서 이 연구를 토대로 『칠정산내편』을 완성해냈다. 이들은 먼저 명나라의 대통력을 연구하여 그 결과로 『대통역일통궤』, 『태양통궤』, 『태음통궤』, 『교식통궤』, 『오성통궤』, 『사여전도통궤』 등을 편찬해냈다. 이 책들은 『칠정산내편』을 완성하기 위한 전초단계의 역법 이론을 망라한 것으로 세종 때의 천문학자들이 중국의 역법 지식을 완전히 소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처럼 15세기 초 서운관의 천문학자들은 당시 사용하던 역법들이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지 않는 원인과 그 근본적인 개선대책을 찾아내기 위하여 당시의 역이론들을 전면적으로 분석 검토하였다. 국내외적으로 알려져 있던 역법들과 역 이론서적들을 구체적으로 비교 분석하고 수정 보충하는 등 역법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한편 한양뿐 아니라 백두산, 강화도 마니산, 한라산 등 주요 지점들에 역서 편찬을 책임진 역관들을 파견하여 각지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였다.

변천

세종대에 본국력을 사용하면서, 명나라 역과 비교하여 날짜를 조정하기도 하였다. 1448년(세종 30)에 정월과 10월의 상현(上弦)이 명나라 역서에는 초8일이고, 본국 역서(曆書)에는 초7일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명나라 역서는 통궤(通軌)의 해 돋는 시각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본국력은 『칠정산내편』의 해 돋는 시각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세종실록』 30년 1월 12일). 이후에도 중국력과 본국력 사이에 오차가 있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성종실록』 5년 6월 6일).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으로 조선의 역법은 일단 완성되었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독자적인 역 계산을 바탕으로 한 달력의 제작이 힘들어지기도 했다. 예컨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명군이 조선력의 사용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제후 나라에 어찌 두 가지 역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개별적으로 역서를 만드는 것은 매우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중국 조정에서 알고 힐문하여 죄를 가한다면 답변할 말이 없을 것이다”라며 자체적으로 달력 만드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선조실록』 31년 12월 22일). 때문에 『칠정산내외편』 이후, 자주적인 역법에 따른 달력의 제작은 임진왜란과 함께 중단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칠정산법은 1653년(효종 4)에 시헌력으로 개력된 이후에도 역 계산에서 계속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내용삼서(內用三書)』
  • 『시헌서(時憲書)』
  • 『교식추보법가령(交食推步法假令)』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이은성, 『역법의 원리분석』, 정음사, 1985.
  • 정성희, 『조선후기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5.
  • 한영호·이은희, 「『교식추보법가령』 연구」, 『동방학지』15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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