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舊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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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토지대장에 등록된 진황지 유형의 하나.

개설

조선후기의 진황지는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의 등록 여부를 기준으로 양진(量陳)과 양후진(量後陳)으로 나뉘었다. 양진은 토지대장에 진황지로 등록된 토지, 양후진은 토지대장에 기경지(起耕地)로 등록되었다가 이후에 황폐화되어서 진황지로 인정된 농지를 일컬었다. 양진은 토지대장에서 구진(舊陳)과 금진(今陳)으로 다시 구별되었다.

내용 및 특징

1720년의 토지대장인 경자양안(庚子量案)에는 진황지를 구진과 금진으로 구별해 놓았다. 구진은 1634년의 갑술양안(甲戌量案)에 진황지로 등록된 토지를 말하며, 금진은 갑술양안에는 기경지로 등록되었으나 그 이후 황폐화되어 경자양안에서 처음으로 진황지로 등록된 토지를 일컬었다.

임진왜란 이후에 진황지를 이와 같이 구별하여 등록한 것은 특정 토지조사를 기준으로 진황지의 증가 여부를 손쉽게 파악하고, 이로써 진황지 등록의 남발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변천

임진왜란으로 황폐화된 진황지가 대규모로 개간되기 시작하자 1634년(인조 12) 갑술양전에서는 진황지를 등록하기 시작하였다. 양진, 즉 양안상의 진황지가 탄생한 것이다. 그 이후 1720년(숙종 46)의 경자양전에서는 진황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갑술양전 때의 진황지를 구진, 경자양전 때의 진황지를 금진으로 구별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대규모의 도별양전(道別量田)이 실시되지 않고 각 읍별로 양전하는 읍별양전(邑別量田)이나 진황지만을 조사하는 사진양전(査陳量田)이 시행되면서 구진과 금진은 원래의 의미를 잃거나 혼란스러워졌다. 따라서 경자양전에서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작성된 기록에서 구진과 금진의 의미를 파악할 때는 사안의 배경과 문맥을 살펴 의미를 판단해야 한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한국사연구회 토지대장연구반, 『조선후기 경자양전 연구』, 혜안, 2008.
  • 오인택, 「18세기 중·후반 査陳의 실태와 성격」, 『부산사학』 31,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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