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암사(飛庵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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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의 절.

개설

비암사(飛庵寺)는 7세기경의 유물이 남아 있어서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유물에서 계유년에 사찰을 창건했다고 했는데 그 명문에 신라와 백제의 관등명이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계유년은 673년(신라 문무왕 13)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비암사와 관련한 기록이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후기 1674년 갑인년의 예송(禮訟) 논쟁이 있을 때 송시열(宋時烈)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이유태(李惟泰)가 비암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내용 및 특징

(1) 창건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 소재한 비암사는 7세기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된다. 고려시대까지 사찰에 관한 문헌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 제106호),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阿彌陀佛碑像, 보물 제367호)이 전하고 있어서 창건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장방형의 돌 4면에 불상과 명문(銘文)을 조각하여 만든 불상인데, 명문에 ‘계유년사월십오일(癸酉年四月十五日)’과 함께 ‘달솔(達率)’, ‘내말(乃末)’, ‘대사(大舍)’, ‘경조사(敬造寺)’, ‘경조차석(敬造此石)’이라는 글자가 등장한다. 달솔은 백제의 관등명이고, 내말과 대사는 신라의 관등명이므로, 백제계 유민들이 제작에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계유년(癸酉年)은 백제가 멸망한 직후의 계유년인 673년으로 추정한다. ‘경조사(敬造寺)’는 공경히 절을 조성했다는 의미고, ‘경조차석(敬造此石)’은 공경히 이 돌을 조성했다는 의미이므로, 계유년인 673년에 사찰을 창건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기축명아미타불비상은 주형광배형(舟形光背形) 석상의 뒷면에 "기축년 2월 15일에 7세의 조상과 부모 및 □□를 위해 아미타불과 여러 보살상을 공경히 조성합니다[己丑年二月十五日 此爲七世父母及□□子□都□ 阿彌陀佛及諸佛菩薩像 敬造]."라는 명문이 있고 제작 기법이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아서 기축년에 해당하는 689년(신라 신문왕 9)에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이 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彌勒菩薩半跏思惟碑像, 보물 제368호)과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비암사삼층석탑(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제3호)이 현존한다.

(2) 조선시대

조선후기 예송 논쟁이 있을 때 이유태가 비암사에 머물렀다. 예송이란 효종(孝宗)이 장자(長子)가 아닌 차자(次子)로서 왕위에 올랐다가 1659년 기해년에 승하하자, 복상(服喪) 기간을 만 1년인 기년(朞年)으로 할 것인지 3년(25개월)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 사건을 기해예송이라 하고, 효종비가 1674년 갑인년에 승하하자 다시 복상 기간을 대공(大功, 9개월)으로 할 것인지 기년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인 사건을 갑인예송이라 한다. 이유태는 갑인예송 당시에 비암사에 있으면서 수원 만의사(萬義寺)에 머물고 있던 우암송시열과 효종비의 복상에 대해 편지를 주고받았던 사실이 있었다(『숙종실록』 6년 5월 12일).

이러한 기록을 통해 비암사가 조선시대에 유학자들이 독서하던 사찰로서, 당시까지 사세(寺勢)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세한 내력은 알지 못하며, 현존하는 전각들은 조선후기 이후에 건립된 것이다.

참고문헌

  • 『범우고(梵宇攷)』
  • 민찬, 「비암사 창사의 배경에 관한 설화적 접근」, 『한국언어문학』61, 한국언어문학회, 2007.
  • 황수영, 「비암사 소장의 신라재명석상(新羅在銘石像)」, 『미술사학연구』4, 한국미술사학회,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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