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士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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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사화기에 훈신·척신의 훈구파와 대립한 재야 사류를 배경으로 한 정치 세력.

개설

사림은 요순 3대의 이상적인 도덕 정치 또는 왕도 정치의 구현을 통해 훈구 대신이 자행한 여러 폐단을 고치고자 하였다. 이러한 갈등 속에 훈구파와 사림파가 직접적으로 충돌한 정치적 사건이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였다. 이들 양 파가 조선중기에 정치적 이상으로 추구하였거나 현실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양상을 정치 세력의 범주로 통칭하여 훈구와 사림이라고 지칭한다.

내용 및 특징

훈구와 사림의 특성

조선왕조가 개창된 지 한 세기가 지난 16세기에 이르러 중앙의 양반 관료들은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 심각한 갈등을 초래하였다. 훈구파는 개국 공신부터 8차례에 걸친 공신 책봉을 통해 형성된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직접적으로는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등장하면서 책봉된 공신과 관련된 훈신과 척신을 가리킨다. 이들은 부국강병의 현실주의 노선을 지키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였고, 흔히 훈구라고 칭하기도 한다.

고려후기에 등장한 신진 사대부 세력을 그 지향했던 정치적 노선에 따라 정몽주 중심의 온건 개량파와 정도전 중심의 급진 개혁파로 구분할 때 사림은 전자, 그리고 훈구는 후자와 맥을 같이한다. 훈구는 이성계 등의 신흥 무장 세력과 연계하여 왕조 개창에 성공하고 새 왕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주축으로 활동하면서 누대에 걸친 특권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공신 책봉을 통한 훈신과 척신으로서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기반으로 정치적으로는 고위 관직을 독차지하였고 경제적으로는 방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였다. 16세기의 사회 경제적 변동과 더불어 훈구의 특권적 경제 비리 행위는 대토지 겸병, 방납의 폐해 등으로 나타났다. 특히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훈구의 고위 관직 독점과 경제적 비리 경향은 더욱 노골화하였고, 통상적으로 훈구파의 뿌리는 직접적으로 이들과 연계된다(『세조실록』 8년 2월 28일) (『성종실록』 8년 1월 21일).

사림의 성장과 정치 이상

사림은 성종 때에 이르러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왕조 개창에 소극적이었던 정몽주 중심의 온건 개량파 신진 사대부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림은 왕위 찬탈로 인해 성리학적 명분에 있어 취약성을 안고 있었던 세조의 지나친 탄압 정치와 국방 강화책 등의 공리주의적 통치 방식으로 인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여기에 강력한 세력으로 포진한 기성의 훈구 대신들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고, 유교 정치의 이상을 회복하기 위한 학문 진흥 정책의 실시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림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다. 성종은 김종직을 필두로 그의 문인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을 등용하였다. 이들은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경상도 출신의 유학자들에게서 학문의 뿌리를 찾았고, 이것은 이후 도통론(道統論) 위주의 성리학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사림은 이상 정치를 추구하는 성리학자들로서 주로 삼사(三司)에 진출하였다. 삼사는 왕과 문무백관의 잘잘못에 대해 간쟁과 논박을 행하고, 경연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여기에 진출해 활동한 사림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훈구에 대응한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당시 사림이 요순 3대의 왕도 정치에 비추어 제기했던 정치적 쟁점은 세조 때의 굴절된 유교 정치의 회복과 훈구 대신들에 의해 자행된 비리 행위였다. 따라서 사림은 왕이 주도하는 영토 확장 등의 지나친 부국강병책, 내수사를 통한 왕실의 재산 축적, 왕실이 주도하는 불교 사찰의 중건 사업과 부역 동원, 권세를 이용한 훈구 대신들의 토지나 노비 등의 무리한 재산 축적 등을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다(『성종실록』 9년 4월 9일).

사림은 일찍이 새로운 왕조 개창에 반대하여 향촌의 중소 지주로 머물면서 향촌 사회의 안정과 지배층으로서의 계급적 우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향소의 복립과 사창제(社倉制)·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의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사창제는 민간이 중심이 된 빈민 구제책으로, 국가가 주체가 되어 정부 곡식으로 운영하는 의창(義倉)과는 성격이 다르다. 향사례와 향음주례는 모두 주나라의 『주례』에 기원을 둔 제도로서, 향사례는 지방의 군현에서 봄가을로 향민들이 모여 활쏘기를 하면서 도덕심을 키우고 군사 훈련도 겸하는 제도이다. 향음주례는 향민들이 모여 일정한 규범 속에 술을 마시면서 예법을 익히는 제도이다.

사화와 사림의 공론 정치

1498년(연산군 4)부터 1545년(명종 즉위)에 걸쳐 벌어진 훈구와 사림 간의 정치적 충돌이 사화(士禍)였다. 사림은 계속해서 화를 당하였지만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주도적인 정치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중종 때에 등장하는 조광조를 비롯한 김식·김정 등은 전형적인 성리학자로서 젊고 기개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관료 천거 제도인 현량과를 통해 대거 등용되었는데 이때 등용된 사림은 기호(畿湖) 지방 출신이 많아 기호사림으로 부르기도 하고, 기묘사화에서 대거 화를 당했기 때문에 기묘사림으로도 부른다(『중종실록』 14년 11월 15일). 조광조 등의 기묘사림은 반정(反正)의 여망을 반영한 유교 정치의 회복과 반정 공신들에 대한 견제 등을 고려한 중종의 의지에 의해 중용되었다. 이때의 사림은 15세기 훈구 가문의 후예도 적지 않았고, 사림으로 관료에 등용되었다가 동료 사림에 의해 훈구로 배척받기도 하였다.

기묘사림은 주로 삼사의 언관직에 진출하여 언관 언론을 통해 훈구 대신들의 비리를 비판하고 왕도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연산군의 학정으로 군신 권력 관계가 파탄 나면서 유교 정치의 실현이 불가능함을 경험했던 조광조 일파는 군주의 철저한 수신을 요구하였다. 이른바 철인 군주론이었고, 도의(道義)를 높이고 인심(人心)을 바로잡으며 성현(聖賢)을 본받고 잘 다스려진 정치를 일으킨다[崇道義 正人心 法聖賢 興至治]’는 것으로 요약되는 지치주의를 강조하였다.

기묘사림은 지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로서 경연의 강화와 언관 언론의 활성화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피폐해진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향약의 실시, 이단 배척을 위한 소격서 폐지, 정몽주·김굉필·정여창 등에 대한 문묘 배향, 내수사 장리(長利)의 폐지, 『주자가례』와 『소학』의 보급을 통한 실천 윤리의 강조, 현량과의 실시 등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

기묘사림의 이러한 요구는 삼사의 언관 언론에 바탕을 둔 언관권의 확대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견제와 균형에 초점을 둔 군권·재상권·언관권의 군신 권력 관계를 파기하였고, 『경국대전』이 표방한 권력 체계를 무너뜨렸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책봉된 대부분의 공신들이 부당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위훈 삭제 사건’을 결정적 계기로 삼아 훈구 대신은 조광조 일파 중심의 사림을 탄압하였다. 이것이 기묘사화였다.

명종 때에 발생한 을사사화는 왕위 승계를 둘러싼 외척 간의 충돌이었으나 윤임 일파인 대윤(大尹)과 윤원형 일파인 소윤(小尹)의 양 파 모두에 사림이 연계되어 사림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네 차례의 사화 가운데 이때 사림의 피해가 가장 컸으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외척 세력에 기반을 둔 권신이 사라지면서 중앙 정계에 남게 된 정치 세력은 사림이었다. 마침내 사림은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리고 선조 때에 들어서 전적으로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후 공론 정치와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사림이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향촌 사회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조직체인 서원과 향약을 통한 향촌 자치제의 실현 때문이었다. 특히 서원은 양반 자제들의 지식인화를 촉진하고 아울러 이들을 정치 여론으로 집단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시 말해 서원은 이른바 공론(公論)에 기반을 둔 붕당 정치의 전개에 따라 유생들이 초야 언론을 제기하는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이때에 사림이 주도하여 전개한 붕당 정치는 공론에 기반을 둔 정치를 말하는데, 공론이 제기되는 주된 통로는 언관들의 언관언론(言官言論)과 중외 유생들의 초야언론(草野言論)이었다.

결국 16세기 전반의 훈구와 사림의 갈등과 충돌은 사림의 승리로 귀결되면서, 아울러 공론을 제기할 수 있는 정치 참여층의 확대에 기반을 둔 붕당 정치의 전개로 이어졌다. 붕당 정치는 시기적으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후반에 걸쳐 존속했던 정치 형태이며, 주도 세력은 사림으로 불리는 집단이었다. 붕당 정치는 그 정치 목표를 성리학적 정치 이념의 구현에 두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정치 운영 방식으로는 공론을 앞세운 언관권의 재상권 비판과 견제, 그리고 붕당 상호 간의 의리·명분 논쟁을 통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채택하였다.

사림의 연구 성과

사림에 대한 다양한 연구 성과로 인해 조선중기와 후기의 역사 전개 과정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가능해졌다. 사화(士禍)와 당쟁으로 점철된 부정적인 역사가 아니라 각 단계 단계마다 제기된 역사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이 시기에 발생하였다. 그 갈등은 주자 성리학의 이념적 논리로 볼 때 ‘이(理)’를 중시한 사림과 ‘기(氣)’를 중시한 사림의 대립을 근간으로 하되 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 변하면서 여러 정파로 계속 나뉘었다. 크게 볼 때 학문적 성향과 사상적 성향을 달리한 양자의 대립과 갈등은 부정적이거나 보수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세의 농업 사회를 근간으로 한 시대 상황 속에서 그 자체가 조선중·후기 역사의 진면목이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8: 조선 중기 사림 세력의 등장과 활동』, 국사편찬위원회, 199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0: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 김돈, 『조선 전기 군신 권력 관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 김돈, 『조선 중기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9.
  • 김범, 『사화와 반정의 시대: 성종·연산군·중종과 그 신하들』, 역사비평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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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휴, 『조선 전기 사림파의 현실 인식과 대응』, 일조각, 1999.
  • 이수건, 『영남 사림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79.
  • 이종욱 외, 『한국사상(韓國史上)의 정치 형태』, 일조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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