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영시(拔英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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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6년에 종친과 문무 관료를 대상으로 시행한 과거.

개설

1466년(세조 12) 단오절에 2품 이상의 종친과 3품 이하의 문무 관료를 대상으로 하여 34명을 선발하였고, 5월 9일에 추가 시험을 보아 6명을 더 뽑았다. 5월 11일과 12일에는 무과를 보아 43명을 선발하였다. 중시(重試)의 예를 적용하여 방방(放榜)과 유가(遊街)·사은(謝恩)·은영연(恩榮宴) 등을 베풀고 승진과 품계를 올려 주는 혜택을 주었다. 발영시는 조선시대에 단 1차례만 시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1466년(세조 12) 5월 5일 세조는 서현정(序賢亭)에서 2품 이상의 종친과 문무 관리들과 함께 단오절을 즐기면서 친히 어제시(御製詩) 9장(章)을 지었다. 함께한 3품 이하의 유신 100여 명과 선전관(宣傳官) 등을 대상으로 어제시에 화답하는 형식으로 책(策)·송(頌)·부(賦)·시(詩) 등 각기 잘하는 것으로 1편을 짓게 하고, 중시(重試)의 예를 적용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2년 5월 5일).

5월 8일, 발영시란 명칭으로 34명을 선발하였다. 장원으로 합격한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김수온(金守溫)에게는 쌀 20석(石)과 3일의 잔치를 하사하였다(『세조실록』 12년 5월 8일).

5월 9일, 이 시험에 미처 응시하지 못한 문신 100여 명을 대상으로 사정전(思政殿)에서 어제시 9장(章)을 지어 추가 시험을 실시하였다. 시험관으로 하동군(河東君)정인지(鄭麟趾)·봉원군(蓬原君)정창손(鄭昌孫)·고령군(高靈君)신숙주(申叔舟)·호조 판서노사신(盧思愼)·형조 판서홍응(洪應)·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이파(李坡)·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서거정(徐居正) 7명을 시험문제를 고시하고 읽어 주는 시험관 독권관(讀券官)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2년 5월 9일).

예조 참판강희맹(姜希孟) 등 6명을 선발하여 8일에 선발한 34명에 더하여 모두 40명을 선발하였다. 이때 김수온이 장원으로 뽑혔다(『세조실록』 12년 5월 10일). 거리 행진을 하는 유가(遊街)에서 문과는 일산[蓋]을 사용하고, 무과는 기(旗)를 사용하도록 명하였다.

5월 11일에는 왕이 직접 서현정에 참석하여 무신 830명을 과녁에 활을 쏘아 맞추는 사후(射侯) 2시(矢)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騎射) 5시로 시험하였고, 12일에는 세자에게 대신 나가도록 하여 재차 무과를 시행하였다. 권지훈련원참군(權知訓鍊院參軍)금휘(琴徽)를 장원으로 하여 43명을 뽑았다(『세조실록』 12년 5월 11일)[『세조실록』 5월 12일 1번째기사].

발영시에서 선발된 사람들은 승진 임용되었다. 장원을 한 김수온은 1품으로 승진시켰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품계를 올려 주었다. 김수온을 중추부 판사(判事)로, 노사신(盧思愼)을 호조 판서로, 이예(李芮)를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로, 양성지(梁誠之)를 대사헌으로, 성임(成任)을 행호조참판(行戶曹參判)으로, 강희맹(姜希孟)을 예조 참판으로, 최사로(崔士老)를 행호군(行(護軍)으로, 최경지(崔敬止)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김겸광(金謙光)을 가정대부(嘉靖大夫)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로 삼았다(『세조실록』 12년 5월 14일).

이어서 발영시의 문과·무과를 방방(放榜)하고 김수온에게 술과 음악을 하사하여 치하하게 하였다(『세조실록』 12년 5월 15일). 5월 16일에 문과·무과가 사은(謝恩)하니 왕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서 술자리를 베풀고, 19일에는 은영연을 의정부에 하사하였다(『세조실록』 12년 5월 16일)[『세조실록』 7월 19일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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