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덕사(奉德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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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이 있던 경주의 절.

개설

봉덕사(奉德寺)는 경상북도 경주시 북천(北川) 부근에 있었던 절이다. 738년(신라 효성왕 2)에 창건되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아버지 성덕왕(聖德王)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큰 종을 만들다가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경덕왕의 아들인 혜공왕이 770년(신라 혜공왕 6)에 종을 완성하여 봉덕사에 봉안하였다. 이 종은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범종 가운데 가장 큰 범종이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에조차 훼손하지 못하도록 특별히 왕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성덕왕이 증조부인 태종무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을 시작했지만, 성덕왕이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효성왕이 738년에 완성하였다. 당시 이 절은 사천왕사(四天王寺)·봉성사(奉聖寺)·감은사(感恩寺)·봉은사(奉恩寺)·영묘사(靈廟寺)·영흥사(永興寺)와 함께 신라의 사찰을 관장하는 기구가 배치되었던 성전사원(成典寺院)이었다.

770년에는 이 절에 봉안할 큰 범종을 완성하였다. 처음에 경덕왕이 그 아버지 성덕왕을 위해 만들다가 이루지 못하고 혜공왕 때에 이르러 종이 완성되었다. 때문에 종의 이름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라고 명명하였다. 구리의 중량이 12만근(18.9t)이고, 종소리가 100여 리(약 39㎞)까지 들린다고 하였다. 당시 신라에서는 나라에 큰 일이 있어 군사를 징집하여 출동할 때는 이 종을 쳤다고 한다. 현재 국보 제29호인 이 종은 각 부분의 양식이 풍부하고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다. 특히 몸통에는 비파를 연주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과 보상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당시는 신라 불교가 융성하던 때이고, 신라 예술의 전성기여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과학 기술과 문화 역량을 총 집약하여 제작하였던, 신라문화의 정화이다.

변천

조선시대에 이르러 경주 북천의 둑이 허물어져 봉덕사가 수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봉덕사가 폐사된 이후에도 성덕대왕신종은 계속 봉덕사종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졌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주부 조에서는 봉덕사에 대해 "지금은 사라졌다. 큰 종이 있는데 당나라 대종(代宗)대력(大曆) 6년 신해에 신라 혜공왕이 만든 것이다. 무게는 구리 12만근인데, 치면 소리가 100여 리까지 들린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성덕대왕신종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 아래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1424년(세종 6) 세종은 봉덕사의 큰 종과 개성연복사(演福寺)의 큰 종은 헐지 말도록 명하였다(『세종실록』 6년 5월 3일).

이후 절은 완전히 폐사되었고, 성덕대왕신종은 1460년(세조 6) 영묘사(靈妙寺)에 옮겨 달았다. 다시 봉황대에 종각을 짓고 보호하다가 1915년 8월에 종각과 함께 박물관으로 옮겼다. 그 뒤 경주박물관이 신축 이전됨에 따라 이 동종도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 전시되고 있다. 속칭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며 국보 제29호로 지정돼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동사강목(東史綱目)』
  • 『동사록(東槎錄)』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채상식, 「신라통일기 성전사원의 구조와 기능」, 『부산사학』8, 부산사학회, 198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