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사(夫仁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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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초조대장경판을 봉안하였다가 몽골에 의해 소실되었던 사찰.

개설

부인사(夫仁寺)는 신라 성덕왕 때 창건된 사찰이다. 고려 고종대에 북쪽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개경 흥왕사(興王寺)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판(初雕大藏經板)을 대구 부인사에 옮겨 봉안하였다. 하지만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조선시대에는 숙종대에 사찰 경내에 있던 흙으로 만든 토불상(土佛像)에서 이틀 간 땀이 흘러내렸으므로 도신(道臣)이 조정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변천

(1) 연원

부인사는 팔공산 남쪽, 동화사 서쪽에 소재해 있다. 부인사의 창건과 관련해서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서는 신라 성덕왕(聖德王) 때 창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이후 편찬된 읍지(邑誌)에서도 모두 성덕왕 창건설을 싣고 있다. 근래의 발굴 조사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건물지와 석탑 축대 등이 발견되었으므로 신라시대부터 사찰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인사는 동음이의(同音異義)인 ‘부인사(夫人寺)’, ‘부인사(夫仁寺)’, ‘부인사(符仁寺)’ 등으로 표기되었다. 고려시대 기록에는 ‘부인사(符仁寺)’라고 표기되어 있고, 조선시대 이후로는 ‘부인사(夫人寺)’와 ‘부인사(夫仁寺)’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부인사에서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로부터 부인사에는 선덕묘(善德廟)라는 사당이 있어서 제사를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선덕여왕이 창건했으므로 절 이름이 ‘부인사(夫人寺)’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2) 고려시대

부인사와 관련해 『고려사』의 1180년(고려 명종 10) 6월에 큰 비가 내려 80여 칸이 물에 잠겼으며 죽은 자가 9명이었다는 기록과, 『고려사절요』의 1202년(고려 신종 5)에 영천(永川) 지방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자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와 부인사 승군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에서 부인사에 보관했던 초조대장경판이 판각된 배경과 소실된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정도전(鄭道傳)은 『삼봉집(三峰集)』에서 화엄종사(華嚴宗師) 우운(友雲)이 부인사 주지가 되었다고 하면서 부인사에 대해 언급하기를, 매우 큰 사찰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려말 부인사는 화엄종의 사찰이며 매우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3) 초조대장경의 판각과 부인사 봉안

초조대장경은 해인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즉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을 만들기 전에 고려에서 처음 판각했던 대장경을 말한다. 대장경이란 불교의 경장(經藏)·율장(律藏)·논장(論藏)을 모두 합친 것을 말한다. 송(宋) 태조(太祖)의 칙명으로 간행하기 시작한 것이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개보칙판인성대장경(開寶勅板印成大藏經)’으로, 줄여서 ‘개보대장경’이라고 부른다. 송 태조의 개보 연간에 황제의 명령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개보칙판’이라고 부르며, 나무에 글자를 새기고 먹물을 입혀 종이에 도장 찍듯이 간행하였기 때문에 ‘인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대장경은 971년(개보 4)에 송 태조의 칙명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여 12년 만인 983년(태평흥국 8)에 완성되었는데, 총 480상자 1,076부 5,048권으로 이루어졌다. 이 대장경은 이웃나라인 고려와 요(遼)에도 전해졌고, 개보대장경을 바탕으로 고려에서 초조대장경, 요에서 거란대장경이 판각되었다.

당시 거란족의 요나라는 현재의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연운(燕雲) 16주를 둘러싸고 송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송나라와 요나라는 고려와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송나라로서는 고려를 통해 요나라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며, 요나라는 고려와 화친하여 후방을 튼튼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는 개국 초부터 북진 정책을 펼쳤고,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를 원수처럼 대하였다. 결국 요나라는 993년(고려 성종 12)에 고려를 침공한다. 그러나 요나라는 고려 정복이 목적이 아니라 고려와 화친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압록강 이남의 강동 6주를 고려가 지배하는 것을 승인하는 형식으로 화친을 약속받고 돌아간다.

그런데 고려 목종이 즉위한 후에 어머니 헌애왕후(獻哀王后)가 섭정을 하였는데, 헌애왕후가 외척이었던 김치양(金致陽)과 불륜을 저지르자 서경(西京, 현 평양)을 다스리고 있던 강조가 김치양 일당을 제거하고 현종을 옹립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틈타 1010년(고려 현종 1)에 요나라가 고려를 침입하였다. 요나라와 우호적이었던 헌애왕후가 권력을 잃고 적대적이었던 강조가 권력을 장악했던 것을 명분으로 삼아 침입하였던 것이다. 이때 부처의 힘으로 요나라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고려 조정에서 국왕과 신하들이 대장경 제작을 발원하여 만든 것이 바로 초조대장경이었다.

초조대장경 판각 사업은 왕실과 귀족의 지원에 힘입어 현종의 재위 기간(1009~1031) 내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029년(고려 현종 20)에는 대장경 판각을 기념하는 장경도량이 대대적으로 베풀어졌다. 그 후 계속 경판이 보충되어 1087년(고려 선종 4) 2월에 초조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선종은 개국사(開國寺)에 행차하여 대장경의 완성을 경축하였고, 3월에는 흥왕사(興王寺)에 행차하여 대장전(大藏殿)의 낙성을 경축하였다. 이때의 초조대장경은 총 6,000여 권으로 개보대장경의 총 5,048권을 능가하였으며,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대장경이었다. 대장경판은 처음에 흥왕사 대장전에 보관하였지만, 거듭되는 북쪽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개경 근처에 보관하기는 불안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대장경판의 안전한 보관을 위해 팔공산 부인사에 옮겨 봉안하였다. 하지만 1232년(고려 고종 19)의 몽고 침입으로 경판은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당시 강화도에 있던 고려 조정은 현종대에 부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쳤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번에 다시 대장경을 판각하여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으로 재조대장경을 판각하였다. 이것이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판이다.

초조대장경판은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지만, 그 대장경판으로 인출(印出)한 대장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그 중에 일본 교토[京都]의 난젠지[南禪寺]에 1,876권, 대마도에 617권이 보관되어 있고, 국내에 약 300권의 초조대장경이 전하고 있다. 국내에 전하는 초조대장경 가운데 24권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11권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4) 조선시대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이후 부인사의 중창과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1679년(숙종 5) 2월 9일에 부인사의 토불상(土佛像)이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토불상이 온몸에서 땀을 끊임없이 흘리다가 그 이튿날에야 비로소 그쳤다는 것이다(『숙종실록』 5년 3월 1일). 그리고 1788년(정조 12)에 주지 성찬(性賛)과 재가자 동악공(東嶽公)이 발원하여 미타암(彌陁庵)에 있던 명부전(冥府殿)을 부인사 대웅전 동쪽에 이전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당시 인악의첨(仁嶽義沾)은 팔공산 도명암(道明庵)에서 거처하다가 성찬의 요청으로 명부전 이건기(移建記)와 상량문(上樑文)을 썼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삼봉집(三峰集)』
  • 『인악집(仁嶽集)』
  • 『범우고(梵宇攷)』
  • 남권희, 「남선사 초조대장경의 서지적 분석」, 『한국중세사연구』28, 한국중세사학회, 2010.
  • 최정환, 「고려시대 초조대장경과 부인사」, 『한국중세사연구』28, 한국중세사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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