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선(龜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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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왜군을 격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전쟁용 배.

개설

구선은 귀선(龜船) 혹은 거북선이라고 칭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순신이 거북선을 처음 만들었다고 했다(『인조실록』 17년 7월 14일). 이순신은 1592년 임진왜란을 목전에 두고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뒤 해전에서 왜선을 격퇴하기 위한 방편으로 판옥선(板屋船)을 기초로 철갑선의 일종인 거북선을 만들었다.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 함대는 거북선을 이용하여 사천해전(泗川海戰)과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왜선을 크게 격파할 수 있었다(『선조실록』 25년 6월 21일).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상으로 조선말기까지 제조되어 주요 수군 기지에 배속되었지만 개항 이후부터 사라졌다.

내용 및 특징

거북선이라는 호칭은 그 모양이 거북같이 생겼다고 하여 지어졌다. 기록마다 차이는 있으나 조선후기 순조대 거북선은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또한 노 없이 바다를 항해하였고 입과 코에서 연기가 나왔다. 당시까지도 표류(漂流)해 온 왜인(倭人)이 거북선을 보고 놀라 ‘이것은 사람을 사로잡는 기계이다’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순조실록』 8년 1월 10일). 또한 거북선은 역풍(逆風)을 만나더라도 앞으로 항해할 수 있어서 수군 함대의 선봉장 역할을 담당하였다(『숙종실록』 2년 1월 24일).

조선시대 주력 전투선은 판옥선으로, 배 위가 튼튼한 송판으로 방어되었고, 위에 지휘를 위한 누각이 세워졌다.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전투를 하는 2층 구조로 전투선의 항적을 유지시키는 노군들이 외부 공격으로부터 보호되었다. 거북선은 이런 구조의 판옥선 위에 덮개를 새로 씌운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순신의 거북선이 임진왜란 시 처음 등장하기는 했으나 기본 구조는 조선초기부터 구상되었다고 여겨진다.

영조대에도 거북선은 사용되었으며 기능이 개선되었다. 2층 위의 장식이 너무 무거워서 바람을 만나면 제어가 어려웠기 때문에 위층의 방패(防牌)는 별도로 제작해 때에 따라 눕혔다 세웠다. 또한 선두(船頭)에는 오리의 목과 같은 뾰족한 곡목(曲木)을 덧붙여 풍랑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주 빠르며, 암석에 부딪히더라도 곡목이 먼저 파손되도록 했다. 영조는 그 제도의 모형을 내전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한 뒤에 비변사에도 보관하게 했다(『영조실록』 11년 1월 20일).

정조대에는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정리되었다. 1795년(정조 19) 정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도설(圖說)에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는 두 장의 그림과 설명문이 있다. 두 개의 거북선은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이다. 그중 통제영에 있던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통제영 거북선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밑바닥 판[底版]은 10쪽을 이어 붙였다. 그것의 길이는 64척 8촌이다. 머리 쪽 폭은 12척, 허리 쪽 폭은 14척 5촌, 꼬리 쪽 폭은 10척 6촌이다.

2) 오른쪽과 왼쪽의 현판(舷版)은 각각 7쪽을 아래에서 위로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맨 아래 첫 번째 판자의 길이는 68척이지만 차츰 길어져서 맨 위 7번째 판자에 이르러서는 113척이 된다. 판자의 두께는 모두 4촌씩이다.

3) 노판(艣版)은 배 앞쪽에 4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4척이다. 두 개의 판이 왼쪽, 오른쪽에 있는데 현자(玄字) 구멍을 내어 각각에 박혈(礟穴)을 두었다.

4) 주판(舳版)에도 7쪽을 이어 붙였다. 높이는 7척 5촌이다. 위의 폭은 14척 5촌이고 아래쪽 폭은 10척 6촌이다. 6번째 판 가운데에 구멍을 뚫고 둘레 1척 2촌의 키를 꽂았다.

5) 좌우 뱃전판[舷]에는 난간[欄]이 설치되어 있다. 난간머리에 서까래를 세로로 가로질렀는데, 바로 뱃머리 앞에 닿게 된다.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운 것과 같은 모습이다.

6) 난간을 따라 판자를 깔고 그 둘레에는 네모 방패를 둘러 꽂았다. 방패 위에 또 난간을 만들었다. 현의 난간에서 패의 난간에 이르는 높이는 4척 3촌이다.

7) 방패의 난간 좌우에는 각각 11쪽의 판자가 비늘처럼 마주 덮고 있다.

8) 배의 등에는 1척 5촌의 틈을 내어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는 데 편하게 했다.

9) 뱃머리에는 귀두(龜頭)를 설치했다. 길이는 4척 3촌, 넓이는 3척이다. 그 속에서 유황염초를 태워 벌어진 입으로 안개처럼 연기를 토하여 적을 혼미하게 한다.

10) 좌우의 노는 각각 10개이다.

11) 왼쪽과 오른쪽 22개의 방패에는 각각 박혈을 뚫었고, 12개의 문을 두었다.

12) 거북머리 위에도 두 개의 박혈을 냈다. 그 아래에 2개의 문을 냈다. 문 옆에는 각각 박혈 한 개씩을 두었다.

13) 왼쪽과 오른쪽의 덮개 판목[覆版] 12개에도 각각 박혈을 뚫었으며 귀(龜) 자가 있는 기를 꽂았다.

14) 왼쪽과 오른쪽의 포판(鋪版)에는 방이 각각 12칸이다. 그 가운데 2칸에는 철물을 넣어두고, 3칸에는 화포, 활, 화살, 창, 칼 등을 넣어두고, 나머지 19칸은 군사들의 휴식처로 쓴다.

15) 왼쪽 갑판 위에 있는 방 1칸은 선장이 거처하고, 오른쪽 갑판 위의 방 1칸은 장교들이 거처한다.

16) 군사들은 쉴 때는 갑판 아래에 있고, 싸울 때는 갑판 위로 올라와 모든 대포 구멍에 대포를 대놓고 지속해서 발사한다.

변천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수군이 왜군을 격퇴하기 위한 주력함으로 채택된 뒤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 1595년(선조 28) 임진왜란 중 조정에서 선조와 신료들은 수전(水戰)이 조선군의 장기이며 거북선이 존재하므로 왜선을 격퇴할 수 있다고 여겼다. 당시 왜군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거북선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거북선에는 대포·불랑기(佛狼機)·화전(火箭) 등의 화기를 대량으로 탑재하여 왜선을 격멸하려고 했다(『선조실록』 28년 10월 27일). 선조는 남해안이 왜군에게 유린되는 상황에서 거북선 제작을 위한 선재 조달을 황해도 등의 서울 이북 지역에서 시행하도록 할 정도로 거북선의 제작을 독려하였다(『선조실록』 30년 2월 7일).

그런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이후 조선 수군의 전선은 60여 척에 불과하였고, 거북선에 승선할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인원도 보충하기 어려웠다. 특히 거북선에서는 조선군의 장기인 활을 사용하기 어려워 각 영(營)에 1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다만 거북선 제작보다 물력이 적게 들고 격군의 수도 적은 창선(槍船)을 제조했다. 창선은 격군 42명이 승선했으며,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았기 때문에 창선이라고 불렀다. 이후 조선 수군은 거북선보다 제작에 용이한 창선의 확보에 주력하였다.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쟁에서만 거북선이 주력선으로 활동하였고, 평화 시에는 주로 창선을 사용하였다(『선조실록』 39년 12월 24일). 선조 이후에도 거북선의 제작이 중지되지는 않았다. 광해군대에는 전라좌·우수영에 이순신이 왜적을 방어하던 법식에 따라 거북선의 군기를 제작하고 수군들을 훈련하도록 했다(『광해군일기』 14년 7월 22일).

거북선은 조선말기에도 조선 수군의 진영에 배치되었다. 1867년(고종 4) 전라도의 청산진(靑山鎭)에 거북선 1척이 소속되어 가리포(加里浦)와 신지도(薪智島)를 오가며 연안을 방어하였다(『고종실록』 4년 6월 17일).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난중일기(亂中日記)』
  •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壬辰倭亂史』, 民族戰亂史, 1987.
  • 金炳崙, 「조선시대 수군 진형과 함재무기 운용」, 『군사』74, 2010.
  •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4.
  • 정진술, 「임란기 조선수군의 무기체계」, 『학예지』4,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1995.
  • 정진술, 「閑山島海戰硏究」, 『壬亂水軍活動硏究論叢』, 해군군사연구실, 1993.
  • 제장명, 「이순신의 수군전략과 한산대첩」, 『군사』 60, 2006.
  • 조원래, 『새로운 관점의 임진왜란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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