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사(大乘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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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원당이었던 경상도 상주 지역의 사찰.

개설

대승사(大乘寺)는 신라 진평왕 때 상주 공덕산(功德山)의 사면석불(四面石佛) 근처에 지은 사찰이다. 고려시대에 천태종 동백련사(東白蓮社)가 인근에 있었고, 산내 암자로는 묘적암(妙寂庵)과 윤필암(潤筆庵)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사찰이 전소된 뒤 수십년에 걸쳐 중건되었다. 효종대에 동평위의 원당(願堂)으로 지정되었으나 현종대에 조정 대신들의 건의에 의해 왕실원당에서 제외되었다.

연원

대승사는 상주 공덕산(功德山)에 소재해 있으며 신라시대 때 창건된 사찰이다. 공덕산은 역덕산(亦德山) 또는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불린다. 대승사의 창건과 관련해 『삼국유사』에 다음의 설화가 전한다. 587년(신라 진평왕 9)에 갑자기 4면이 1장씩 되는 큰 바위가 하나 나타났다. 붉은 비단에 싸여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바위의 사면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행차하여 공경히 예경하고, 바위 옆에다 사찰을 짓고 대승사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법화경』을 독송하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를 초청하여 대승사 주지를 맡겼다고 한다.

내용 및 변천

(1) 고려시대

대승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 천태종(天台宗)의 백련결사(白蓮結社)와 관련해서 다시 등장한다. 진정 국사천책(天頙)이 상주목사최자(崔滋)의 초청으로 동백련사의 초대 법주(法主)가 된다. 동백련사는 대승사의 서남쪽 10리(약 4㎞) 지점에 있었다. 원래 그 자리에 미면사(米麵寺)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1241년(고종 28)에 상주목사로 부임한 최자가 이때 크게 중수하고 백련결사 도량을 열었다. 백련결사는 전라남도 강진만덕사(萬德寺)에서 원묘요세(圓妙了世)가 1216년(고종 3)에 천태종의 결사도량을 열었던 것이 처음이었고, 조계종의 송광사 수선결사(修禪結社)와 더불어 고려시대 최대의 결사였다. 강진만덕사 백련결사의 성공을 이어받아 최자가 상주미면사에 또 다른 백련결사를 열어 천책을 초빙하였다. 이에 따라 강진의 백련결사는 남백련사로 불리고, 상주의 백련결사는 동백련사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시대 대승사가 동백련사와 함께 언급되는 이유는, 공덕산이 세 개의 기슭으로 갈라져 있는데, 서쪽에는 대승사, 동쪽에는 천주사(天柱寺), 중간에는 미면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 대승사가 공덕산과 가장 가깝고 그 다음이 천주산이다. 그런데 미면사와 대승사가 가까웠기 때문에 예로부터 미면사의 동백련사를 서술할 때 대승사기(大乘寺記)에 붙여서 서술했다.

대승사의 산내 암자로 묘적암과 윤필암이 있는데, 묘적암은 나옹혜근(懶翁惠勤)이 출가한 곳이다. 나옹혜근은 고려말의 고승으로 왕사(王師)가 되었던 승려이다. 그리고 윤필암은 고려말에 승려 각관(覺觀)과 찬성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가 조성한 암자이다.

(2) 조선시대

조선전기 함허득통(涵虛得通)은 대승사에서 1406년~1409년에 세 번 반야강석(般若講席)을 열었다. 반야강석이란 『금강경(金剛經)』을 강의하는 법회를 의미한다. 이때의 강석을 계기로 훗날 함허득통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편찬하였다. 『금강경오가해』는 『금강경』에 대한 부대사(傅大士)의 찬(贊)과 육조(六祖)의 구결(口訣)과 규봉(圭峰)의 찬요(簒要)와 야보(冶父)의 송(頌)과 종경(宗鏡)의 제강(提鋼)을 합친 책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사찰 강원(講院)의 주요 교재가 되어 오늘날까지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불교 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대승사는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수십 년에 걸쳐 중창했다. 법당은 1648년(인조 26)에 승려 의현(儀玄)이 중창하고 아미타불·관음보살·지장보살을 안치하였다. 법당 앞 동쪽에 있는 선당(禪堂)은 1651년(효종 2)에 경묵(敬黙)이 중창하고, 서쪽에 있는 승당(僧堂)은 1689년(숙종 15)에 종수(宗秀)가 중창했다. 법당 좌측의 동상실(東上室)은 1655년(효종 6)에 의현이 중창하고, 법당 우측에 있는 서상실(西上室)은 1701년(숙종 27)에 연축(衍笁)이 중창했다. 종각은 1624년(인조 2)에 쌍언(雙彦)이 중창하고, 미륵전은 1630년(인조 8)에 계담(桂淡)이 중창하였다. 침계당은 1650년(효종 1)에 신욱(信旭)이 새로 지었다.

효종대 대승사의 불사는 왕실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660년(현종 1)에 이조(吏曹)에서 상주 대승사와 담양옥천사의 원당을 혁파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왕이 윤허하였다(『현종실록』 1년 4월 3일). 당시 대승사는 효종의 넷째 딸인 숙정옹주와 동평위 집안의 원당이었으나, 이조에서 왕실원당의 면세 특혜를 문제 삼아 원당을 혁파케 한 것이다. 조선후기 왕실원당은 왕실이나 궁방의 복을 비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면세·면역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국가 재정의 축소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조나 호조에서는 궁방에 속해 있는 원당의 혁파를 왕에게 거듭 요청했다. 대승사는 이러한 조정의 요구에 의해 왕실원당으로서의 기능이 혁파되었다.

그 이후에도 대승사의 불사는 계속 이어졌다. 나한전(羅漢殿)은 1665년(현종 6)에 혜탄(惠坦)이 중창하고, 관음전은 1667년(현종 8)에 승열(承悅)이 중창하였다. 천왕문은 1688년(숙종 14)에 초전(草田)이 건립하고, 만세루는 1689년(숙종 15)에 대심(大心)이 건립하였다. 그리고 시왕전[十王殿]은 1703년(숙종 29)에 원응(圓應)이 중창하였다. 또한 1727년(영조 3)에 현율(玄律)이 종각을 단청하고, 1730년(영조 6)에 최정(最貞)이 금강문을 지어 금강역사상·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을 안치하였다. 이듬해 1731년에는 여찬(呂粲)이 천왕문·금강문·일주문을 단청했다. 그리고 1831년(순조 31)에 구담(九潭)이 중창하였다. 그 후 1862년(철종 13)에 명부전과 응진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다시 중건하였다.

참고문헌

  • 원각불교사상연구원 편, 『한국천태종사』, 대한불교천태종, 2010.
  • 한국학문헌연구소 편, 『대승사지』, 아세아문화사, 1982.
  • 탁효정, 「조선시대 王室願堂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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