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사(大屯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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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대사의 충의를 기리는 표충사(表忠祠)가 있는 사찰.

개설

대둔사(大屯寺)는 신라말 도선 국사가 창건하였으며 대흥사(大興寺), 혹은 한듬절이라고도 불린다. 옛날에는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 혹은 한듬산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한듬절이라고도 한 것이다. 대둔사는 조선후기부터 본격적으로 기록에 등장한다. 1789년(정조 13)에 표충사(表忠祠)가 공인되어 서산 대사의 충의를 기리는 제향을 지냄으로써 불교의 종원(宗院)으로서 자부심이 있었다. 19세기에는 초의의순이 주석하며 백파긍선과 선(禪)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연원

대둔사는 창건과 관련하여 426년에 정관(淨觀) 존자, 혹은 514년에 아도(阿道) 화상, 혹은 신라말 도선(道詵) 국사가 창건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만일암고기(挽日庵古記)』에는 426년에 정관 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하고, 508년에 이름을 전하지 않는 비구가 중건했다고 되어 있다. 『죽미기(竹迷記)』에는 514년에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대둔사지(大芚寺志)』에서는 정관 존자와 아도 화상의 창건 설화를 비판하며 신라말에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고 하였다. 그 외 다른 기록에서 대둔사의 창건에 관해 언급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응진당 옆에 있는 삼층석탑이 신라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대웅보전 북미륵암의 마애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이 고려초기에 조성되었으므로 신라말에는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용 및 변천

(1) 고려~조선시대

고려시대에는 진정 국사천책(天頙)이 대둔사에 머물렀다는 기록만이 보인다. 천책은 강진백련사(白蓮社) 제4대 조사로서 천태종 승려였다. 이후 더 이상 대둔사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조선후기에 다시 나타난다. 1672년 2월에 전라도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대둔사 큰 종이 저절로 울리다가 한 식경 뒤에 멈추었다고 한다(『현종실록』 13년 2월 12일). 이에 도신(道臣)이 대둔사의 일을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불길한 징조라고 여겼다(『현종실록』 13년 2월 29일).

(2) 18세기 표충사(表忠祠)의 공인

18세기 대둔사는 서산(西山) 대사(大師) 휴정(休靜)의 충의(忠義)를 기리는 표충사를 건립함으로써 사격이 크게 높아진다. 조선은 유교적 국가를 건설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불교에 대해서는 배척 내지는 방관자적 태도를 보였다. 조선초 태종대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고려시대 이래 존속해 왔던 불교 기구를 폐지하기 시작하였고 사찰에 대한 국가적 지원도 줄여나갔다. 그리하여 명종대에 이르러 불교는 정부로부터 거의 소외되었고 국가 운영에도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선조대에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승려들이 무기를 들고 의승병으로 참전함으로써 조정 대신들은 불교의 효용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승려들은 산성(山城)의 수축이나 사고(史庫)의 수호에 동원되어 국가의 부역을 담당하였고, 조정 대신들도 더 이상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후기 대부분의 승려들은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서산 대사 휴정을 스승으로 여겼다. 그런 이유로 서산 대사의 의발(衣鉢)이 전수되는 곳은 불교계의 종원(宗院)으로 인식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대둔사였다. 대둔사는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해 있었지만 서산 대사의 충의를 기리는 표충사가 있었기 때문에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사당은 원래 가묘(家廟)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승려를 위해 사당을 짓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충의를 중시하는 유교적 가례(家禮)의 영향과 조선후기 불교계의 요청에 의해 국가에서 불교 사당을 공인하였다. 승려의 충의를 기리는 사당으로서 맨 먼저 국가의 공인을 받은 곳은 밀양 표충사였다. 1743년(영조 19)에 사명(四溟) 대사(大師)유정(惟政)의 진영을 모신 밀양 표충사에 왕의 사액이 하사되어 국가적으로 공인되었다.

그 후 사명 대사의 스승이며 임진왜란 때 초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었던 서산 대사를 기리는 표충사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대둔사 승려 계홍(戒洪)과 천묵(天黙) 등은 1788년(정조 12)에 상언단자(上言單子)를 조정에 올려, 대둔사는 서산 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므로 ‘표충(表忠)’의 사액을 내려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정조가 ‘표충사(表忠祠)’의 사액을 내리고, 그 이듬해인 1789년(정조 13) 4월에는 예관(禮官)을 보내 제향(祭享)하도록 함으로써 대둔사 내에 서산 대사의 충의를 기리는 표충사가 공인되었다.

대둔사에 표충사가 공인된 후 여러 사원에서 고승의 사당을 공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안변석왕사(釋王寺)에서는 무학(無學) 대사(大師) 초상이 있었으므로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의 사당을 공인했던 것처럼 사액을 내려달라고 요청하여, 1792년(정조 16)에 사액을 받고 매년 제향하였다(『정조실록』 16년 윤4월 24일). 또한 묘향산보현사에서는 서산 대사가 주석했던 보현사에도 충절을 기리는 사당을 공인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결국 1794년(정조 18)에 ‘수충사(酬忠祠)’라는 편액이 하사되었다. 이로써 사명 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밀양 표충사, 그리고 서산 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대둔사 표충사와 보현사 수충사가 공인되었던 것이다.

대둔사 표충사에는 원장(院長)을 두고 별도로 제향(祭享)을 담당할 도유사(都有司)를 두었다. 표충사의 초대 원장으로 1789년에 연담유일(蓮潭有一)이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황해도 백천호국사에 주석하고 있던 천봉태흘(天峯泰屹)이 8월에 부임하였다. 표충사 원장의 임기는 대략 1년이었으며 거의 매년 전국에서 명망 있는 승려들이 부임하였다. 표충사 원장의 출신지는 전라도에 주석하던 승려가 많긴 했지만 강원도, 황해도, 경상도 등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다. 이는 대둔사가 전국의 종원으로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 19세기 초 대둔사 중창과 사지 편찬

1811년(순조 11)에 대둔사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세 전각만을 남기고 모든 건물이 불탔다고 한다. 이에 당시 주지로 있던 완호윤우(玩虎尹佑)가 중창 불사를 시작하여 1813년 5월에 극락전·용화당·지장전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1817년에는 천불전(千佛殿)을 짓고 천불(千佛)을 봉안하기 위해 경주 불석산(佛石山)에서 옥돌로 불상을 조성하였다. 1,000구(軀)의 불상을 2대의 배에 나누어 싣고 대둔사로 향했는데, 부산 앞바다에 도착할 무렵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으로 768구의 불상을 실은 배가 표류하여 일본 큐슈[九州]에 이르렀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인 1818년에야 대둔사로 돌아와 천불전에 안치되었다. 이러한 중창 불사의 성공은 대둔사의 자부심을 더욱 고양시켰고, 사지(寺志)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대둔사지』 편찬은 유배 생활을 하던 다산정약용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완호윤우, 아암혜장(兒菴惠藏), 초의의순(草衣意恂) 등에 의해 4권 2책으로 1818년경에 편찬되었다. 권1에서는 대흥사의 연혁과 12종사·12강사에 대해 서술하고, 권2에서는 중관해안(中觀海眼)이 1636년에 대흥사의 역사를 기술한 『죽미기(竹迷記)』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음을 비판하면서 전각의 건립 등을 실증적으로 기술하였으며, 권3에서는 서산 대사의 행적을 정리하고 표충사 설립과 관련한 자료 및 경위들을 소개하였고, 권4에서는 정약용이 찬술한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를 싣고 있다. 여기서 『대둔사지』의 중심이 되는 것은 권1이다. 편찬자들이 "태고보우 화상이 중국에 들어가서 임제종 정맥을 얻었으며, 여섯 번 그 등불이 전래되어 서산 대사에게 이르고 의발이 대둔사에 전해지니, 대둔사가 우리나라 선교의 종원이다."라고 하여 대흥사가 선교양종의 종원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4) 19세기 중반 선 논쟁

19세기에 대둔사에 주석하고 있던 초의의순(草衣意恂)과 선운사에 주석하고 있던 백파긍선(白坡亘璇)이 선(禪)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전국 강원(講院)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였으며 근대까지 지속되었다. 백파긍선은 선운사와 백양사 등지에서 조사선을 현창하며, 1820년경에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저술하였다. 긍선은 예로부터 선사들이 법(法)에 의거하여 의리선(義理禪)과 격외선(格外禪)으로 나누고, 인(人)에 의거하여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으로 나눈 것을 비판하며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에 배대하고 그보다 낮은 단계로 의리선을 두었다. 즉 조사선·여래선·의리선의 삼종선(三種禪)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초의의순은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저술하여, 옛 선사들의 주장을 지지하며 긍선의 삼종선 주장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선 논쟁에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도 참여하여 초의의순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5) 근대의 대둔사

표충사의 공인 이후 종원의 위상을 이어가고자 했던 대둔사는 선 논쟁에서 그 위상을 다시 한 번 대내외에 알리게 되고, 그 자신감으로 19세기 말에 범해각안(梵海覺岸)이 『동사열전(東師列傳)』을 찬술하였다. 『동사열전』은 198명의 승려 전기를 수록하였는데, 170명이 조선후기 인물로서 대부분 대흥사와 인연이 있는 승려들이다. 이에 자극 받은 송광사의 금명보정(錦溟寶鼎)은 1920년경에 송광사 출신 승려를 중심으로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대둔사는 점차 쇠락하기 시작하였으며 가람의 규모를 유지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참고문헌

  • 『대둔사지(大芚寺志)』
  • 조선총독부, 『(증보교정)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경성인쇄소, 1911.
  • 김용태, 「대둔사의 ‘종원(宗院)’ 표명과 그 불교사적 의의」, 『구산논집』, 보조사상연구원, 2006.
  • 이종수, 「조선후기 대둔사 현창 운동과 그 의미」, 『동국사학』, 동국대학교 사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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