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재(九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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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하여 성균관 안에 설치한 아홉 개의 전문 강좌.

개설

구재는 1367년(고려 공민왕 16)의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를 조선 왕조가 이어 받아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수록한 제도로써, 경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진흥시키기 위하여 성균관 안에 설치한 아홉 개의 전문 강좌다. 그러나 이 제도는 국학의 허소화(虛疎化) 때문에 금방 형해화되었고, 1466년(세조 12)에 다시 시행하였으나 곧 폐지되었다.

내용 및 특징

『고려사』에 의하면 1367년에 성균좨주(成均祭酒)임박(林樸)의 상언으로 생원을 늘려 100명에게 급식을 제공하면서 처음으로 수학 과정을 시경·서경·역경·춘추·예기재의 오경재와 대학·논어·맹자·중용재의 4학재의 9재 즉, 오경사서재로 나누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듬해 왕이 구재에 거둥하여 경의(經義)로써 여러 생도를 시험했다[『태종실록』 5년 3월 30일]. 이것이 구재의 출발로 보인다.

이 교육 방식은 조선 왕조로 계승되어 『경제육전』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식년(式年)의 과거는 반드시 오경에 능통한 자라야 응시를 허용한다. 그러니 성균관으로 하여금 사서오경재로 나누어 가르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도는 맨 먼저 대학재에 들어간다. 거기서 읽기를 마치면 성균관에서 이를 예조(禮曹)에 보고한다. 그러면 예조와 사헌부의 관원 각 1명이 성균관의 관원과 합동으로 고강(考講)하여, 그 해설이 상세·분명하여 근본 뜻을 속속들이 꿰뚫어 통한 자는 문부(文簿)를 만들어 이름을 써서 논어재로 올리고, 통하지 못하는 자는 통할 때까지 그대로 대학재에 머물게 한다. 『논어』·『맹자』·『중용』재의 고강과 진급도 모두 이 예에 의하되, 『중용』재까지의 강설(講說)이 모두 통달의 수준에 이른 자는 예기재로 올린다. 『예기』재를 수료하면 성균관이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와 사헌부의 관원이 고강하기를 사서(四書)의 예와 같이 한다. 이와 같이 올려 춘추재·시재·서재·역재까지 이르게 한다”[『세종실록』 12년 8월 22일].

변천

조선 건국 초 성균관 거관자의 수가 30~40명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그 정도의 학생으로는 순차적으로 진급하는 아홉 개의 전문 강좌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국한 지 36년이나 지난 1428년(세종 10)에 경연 석상에서 강경(講經)·제술(製述) 논쟁과 관련하여 평상시에는 구재로 나누어 고강하여 진급시키고, 시취(試取)할 때는 제술을 사용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 제기된 것이 구재에 대한 사실상 첫 언급이다(『세종실록』 10년 2월 22일). 1460년(세조 6)에 예조의 계청에 의해 구재법을 시행하기로 했을 때도 이것이 고려의 법이라고 했을 뿐 조선 왕조 자체의 시행 경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세조실록』 6년 9월 17일). 그러다 1466년에 드디어 구재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에 의하면, 매년 봄과 가을에 예조의 당상관 2명, 예문관 당상관 1명, 사헌부·사간원의 관원 각 1명이 성균관에 모여 세 곳을 시험해 상위 과정으로의 진급을 허락하고,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마지막 역재까지 끝낸 사람에게는 식년마다 문과 회시(會試), 즉 2차 시험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기로 하였다(『세조실록』 12년 2월 23일). 그러나 1468년(세조 14)에 사헌부 대사간예승석(芮承錫) 등이 올린 상소문을 보면 “어찌하여 법을 세운 지 오래지 않아서 곧 다시 폐하였습니까?”라고 하면서 개탄하고 있다(『세조실록』 14년 6월 20일). 즉, 구재는 시행한 후 2년 만에 폐지된 것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