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봉사(鳴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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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소백산에 있는 절로, 조선문종(文宗)의 태봉(胎封)을 수호한 사찰.

개설

명봉사(鳴鳳寺)는 경상북도 예천군소백산에 있는 절이다. 통일신라시대 두운(杜雲)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고려시대의 절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명봉사 뒤편에 문종(文宗)의 태봉(胎封)이 조성되어 사격(寺格)이 상승되었다. 17세기 이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고, 현대기에는 6·25전쟁 때 소실된 절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원

875년(신라 헌강왕 1) 두운(杜雲)이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창건 당시 산 속에서 봉황(鳳凰)이 울어 명봉사로 명명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이후 고려시대 명봉사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변천

(1) 조선시대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전국의 명당자리를 선별하여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거쳐 아기의 태(胎)를 봉안하는 태실(胎室)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태실이 위치한 고을은 전에 비해서 그 격(格)이 상승되기 마련이었다. 태실의 주인공이 왕위(王位)에 즉위하면 태봉(胎封)으로 봉해지면서 다양한 시설물이 추가로 조성되고, 그곳 고을의 격은 한층 상승되었다. 따라서 명봉사 뒤편에 문종의 태봉이 지정되면서 명봉사의 사격(寺格)도 전에 비해 현격히 상승되었을 것이다.

17세기 이후 명봉사는 여러 차례 화재로 절이 소실되면서 중창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1662년(현종 3) 화재로 절이 전소된 뒤 여러 승려들이 힘을 모아 중건하였다. 1668년 절이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신익(信益) 등이 중창의 뜻을 세우고 10여 년 동안 시주를 받아 크게 중창하였다. 1807년(순조 7) 행선(幸善)이 절을 중수하여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50년 6·25전쟁 때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2) 현대

1955년 주지 만준(滿俊)이 6·25전쟁 때 소실된 절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과 약사전,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6·25전쟁 때 유일하게 소실되지 않은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薩像)이 봉안되어 있다. 부속 암자로 고려 태조 때 자적(慈寂) 선사(禪師)가 건립한 내원암(內院庵)이 있다.

현재 명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문화재

문종대왕태실비(文宗大王胎室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 사도세자태실비(思悼世子胎室碑), 경청선원 자적선사능운탑비(境淸禪院 慈寂禪師陵雲塔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호) 등이 있다. 자적선사능운탑비는 941년(고려 태조 24)에 건립된 자적홍준(慈寂洪俊)의 탑비로, 심하게 마멸된 것을 1976년에 판독하였다. 이 탑의 비문은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문하 제자인 □유(□裕)가 구양순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웠다. 자적 선사는 봉림산문(鳳林山門)의 진경(眞境) 대사에게 출가하여 경명왕도 만나고 예천 지방 세력의 후원도 받았으며 태조를 만나 경청선원(境淸禪院)을 조성하다 입적하였다. 음기에 국가에서 선원 명칭을 윤허받은 것을 인용한 광평성 문서인 첩(帖)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이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려 공문서와 이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음기 끝부분에 국통과 삼강직(三綱職)과 재지 유력자들을 망라한 재자제자가 수록되어 고려초 지방 세력 파악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 한국역사연구회, 『譯註 羅末麗初金石文』上下, 혜안, 1996.
  • 南豊鉉, 「高麗初期의 貼文과 그 吏讀에 대하여-醴泉鳳岩寺의 慈寂禪師의 陰記의 解讀-」, 『古文書硏究』5, 한국고문서학회, 1994.
  • 李智冠,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 1, 伽山文庫, 199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