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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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리가 거관과 천전할 때 기준으로 삼는 근무 일수.

내용

조선초기 도(到)는 오위(五衛)의 군사가 번상하여 근무한 일수(日數)를 이르는 말이었다. 또한 군직은 직숙(直宿)을 하고 날마다 도를 받았는데 이를 도숙(到宿) 혹은 사도(仕到)라고 하였다. 이때 근무 일수가 차면 도만(到滿)이라 하여 군직의 천전(遷轉)이나 거관(去官) 등 인사의 기준이 되었다.

1426년(세종 8) 함길도 경원부의 방어에 동원된 병사는 출동하는 날수를 서울에서 번을 드는 병사의 예에 의하여 아침과 저녁에 도(到) 1점씩을 주고, 접전하는 날 힘써 싸운 자는 사실을 조사하여 도 100점을 주도록 하였다. 또한 1428년(세종 10) 삼군의 연로한 갑사(甲士)는 그동안 시위에 참여한 공을 인정해 시재(試才)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도숙한 차례에 따라 거관하도록 하였다. 반면 시재(試才)에 우수한 병사와 금법(禁法) 위반자를 단속한 관리는 별도(別到)가 포상으로 지급되었다. 시예(試藝)에 능한 자에게는 실력에 따라 10~50도가 포상으로 지급된 반면, 훈련과 근무에 불성실한 군사는 손도(損徒)에 처하여 오히려 축적한 도를 감하기도 하였다.

한편 1459년(세조 5) 병조는 도적을 체포한 군사에게 논공행상에 대한 포상으로 도를 특별히 지급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때 도적을 잡을 때 군사가 많으면 쉽고, 군사가 적으면 어렵다는 점이 감안되어, 포상으로 지급된 도의 양은 참여 군졸의 적고 많음에 따라 반비례하였다. 따라서 10명 이하의 군사가 동원되어 도적을 체포할 경우는 30도가, 30명 이상의 군사가 동원되어 도적을 체포할 경우는 10도가 지급되었다. 또한 20명 이하의 군사가 강도를 체포할 때는 100도가, 30명 이하의 군사가 강도를 체포할 때는 90도가 지급되었다.

한편 도가 관리 승진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일부 관료는 사일첩(仕日牒)을 조작하여 도의 수를 늘리기도 하였다. 조정은 도의 조작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개(到改)를 범한 관리를 장(杖) 60으로 처벌하였다.

용례

兵曹啓 去十月初十日巡綽軍士 竝給到一百五十 都城門外巡綽軍士等 不在此例 直宿瑢友直軍士及姦黨捕斬時隨從軍士 各給到一百 在京軍士聞變來侍衛者 各給到五十 其餘宿衛軍士 竝給到三十 從之(『단종실록』 1년 11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