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사(斷俗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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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경상남도 산청군지리산에 위치한 절.

개설

단속사(斷俗寺)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지리산에 위치해 있었다. 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전기까지 유지된 대표적인 선종 사찰이다. 고려 무인집권기에 사찰의 전성기를 누렸으며, 특히 수선사와 관계가 깊어 주목된다. 조선 세종대에 조선 불교를 선·교 양종으로 불교 교단을 정리할 때 선종 18사 중 하나가 되었으나 15세기 후반 이미 사찰이 많이 퇴락하였고, 정유재란 때 사찰 전체가 불타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연원 및 특징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748년(신라 경덕왕 7) 대나마(大奈麻) 이순(李純)이 조연사(槽淵寺)를 중창하고 이름을 단속사로 고쳤다는 설과, 763년(신라 경덕왕 22) 신충(信忠)이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신라하대 이후 지리산 지역의 대표적인 선종 사찰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신라하대 중국에 유학한 뒤 선을 신라에 전한 신행 선사가 779년(신라 혜공왕 15) 단속사에서 입적하자 813년(신라 헌덕왕 5) 왕명으로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가 세워졌는데, 이 비는 현재 남아 있는 승려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시대에는 의종대 왕사를 지낸 탄연(坦然)의 하산소로, 1158년(고려 의종 13) 탄연이 단속사에서 입적하자 왕명으로 대감국사비(大鑑國師碑)를 세웠다.

한편, 단속사는 무신집권기 최씨 집안의 후원을 받은 사찰로 수선사 및 재조대장경 판각과도 중요한 관계가 확인된다. 단속사가 위치한 진주 지역은 최씨 집안의 경제적 근거지였으며, 이 시기 불교계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한 수선사를 최씨 집안이 후원하면서 수선사 제2세 사주인 혜심(慧諶)을 단속사 주지로 임명하고, 집정자 최우(崔瑀)의 아들 만종(萬宗)을 혜심 문하로 출가시켜 단속사에 있게 하였다. 또한 수선사 4대 사주 혼원(混元), 5대 사주 천영(天英)도 단속사 주지에 임명되었다. 고려말의 정황은 전하지 않지만, 세종대 단속사가 선종 18사 중 하나에 포함된 것으로 미루어 단속사의 사세는 조선초까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신행선사비와 대감국사비는 없어졌고,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쌍탑으로 절터에 남아 있는 3층석탑 2기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건물지의 초석이 아직 남아 있다.

변천

1424년(세종 6) 7개의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36개의 사찰만을 공인하면서 진주 단속사를 선종 사찰로 지정했는데, 원래 사찰에 있던 전지가 100결이고 여기에 100결을 더하여 200결의 전지를 공인하고 절에 거주하는 승려를 100명으로 정한 것으로 보아(『세종실록』 6년 4월 5일) 단속사는 규모가 큰 사찰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단속사는 최치원(崔致遠)이 머물던 사찰로 유명하였고(『세종실록』 15년 2월 9일), 절에는 한유(韓愈)의 글을 모은 『한창려문집(韓昌黎文集)』과 고려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판목이 있었다고 한다[『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세종대 이후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속사와 관련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한편, 고려말에는 강회백(姜淮伯)이 단속사에서 글을 읽을 때 손수 매화를 심었다고 한다. 이후 그가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자 이 매화를 정당매(政堂梅)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일손(金馹孫)이 남긴 지리산 여행기에 의하면 강회백의 후손이 대대로 봉식(封植)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매화는 지금도 남아 있다.

세종대 이후 단속사의 정황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남긴 지리산 유람기나 시에서 확인되는데, 대개 15세기에 집중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450년~1457년 사이 보광대전(普光大殿)을 중창하는 등 사찰을 중수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나, 1487년(성종 18) 남효온(南孝溫)의 여행기에서는 대감국사비가 뽑혀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1489년(성종 20) 김일손의 「속두류록(續頭流錄) 」에는 최치원(崔致遠)이 남겼다고 전하는 광제암문(廣濟巖門)을 비롯하여 대감국사비, 신행선사비가 있음을 전하고 있고, 장경판각(藏經板閣), 치원당(致遠堂), 500구의 석불 등도 절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고려 인종(仁宗)과 의종(毅宗)이 대감 국사에게 보낸 문안장(問安狀), 원 간섭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 고신(告身) 등 여러 편의 고문서가 당시까지도 절에 전하고 있었음도 확인되어 주목된다. 그러나 절 건물이 황폐해져 승려가 거주하지 않는 것이 수백칸에 이르고 있다고 하고 있어, 15세기 말 이미 단속사가 많이 퇴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단속사에는 사명유정(四溟惟政)이 머물고 있었음이 주목되며, 또한 서산휴정(西山休靜)이 찬술한 『삼가귀감(三家龜鑑)』을 판각하였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1568년(선조 1) 단속사에 공부하러 간 유학자들 중 성여신(成汝信)이 『삼가귀감』의 목차에 불만을 품고 불상과 판목에 불을 질렀다. 이 일은 단속사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유재란 당시 사찰 전체가 불타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속동문선(續東文選)』
  • 『탁영집(濯纓集)』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정,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1.
  • 송희준, 「단속사의 창건 이후 역사와 폐사과정」, 『남명학연구』9,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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