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녕전(敬寧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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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경녕전 |
한글표제 | 경녕전 |
한자표제 | 敬寧殿 |
상위어 | 혼전(魂殿) |
관련어 | 인경왕후(仁敬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
분야 | 왕실/왕실의례/흉례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현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경녕전(敬寧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27년 8월 20일, 『숙종실록』 27년 12월 9일, 『숙종실록』 27년 12월 25일, 『숙종실록』 27년 12월 17일 |
경덕궁에 있던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신주를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달랐다. 왕이나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반면,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는 3년상이 아닌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었다.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경녕전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혼전이다. 인현왕후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인현왕후는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후에 해당하였다.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경녕(敬寧)’으로 정하고(『숙종실록』 27년 8월 20일), 5개월 뒤 명릉(明陵)에 장례를 치렀다. 이후부터 1720년(숙종 46) 숙종이 승하하고 3년상을 치를 때까지 경녕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701년 8월 14일 인현왕후가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승하하자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12월에 명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숙종실록』 27년 12월 9일). 이때 창경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경녕전이다.
인현왕후의 혼전은 처음에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에 설치하였다. 이곳에 마련한 숙종의 첫 번째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혼전인 영소전(永昭殿)을 임시로 명정전(明政殿)에 옮겨 봉안하고 그곳에 인현왕후의 혼전을 마련한 것이다. 얼마 뒤 경덕궁의 계상당(啓祥堂)으로 혼전을 옮기면서 이곳이 인현왕후의 혼전으로 최종 정해졌다(『숙종실록』 27년 12월 25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2월 15일에 사우제(四虞祭)를 지내고 12월 17일에 영소전을 다시 창경궁의 문정전으로 옮겨 봉안하였고(『숙종실록』 27년 12월 17일), 12월 25일에 경덕궁의 계상당으로 경녕전을 옮겼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달리 경녕전이 창경궁 안에 있었으며, 1721년(경종 1)에 경녕전을 임시로 시민당(時敏堂)에 봉안하면서 혼전의 전각명은 그대로 ‘경녕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혼전의 전각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혼전명은 바뀌지 않았다.
대신들이 모여 시호는 ‘인현(仁顯)’, 혼전의 전호는 ‘경녕’으로 정하였다. 경녕전이 혼전으로 존재하는 동안 경녕전은 인현왕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경녕전의 제사는 반우한 날 초우제(初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 상제, 담제 의절을 모두 거행하였다. 그 밖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를 지냈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그 밖에 혼전에서 거행한 의식 중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에서 내린 제사와 시호를 받고 분황(焚黃)하는 의식을 행하였다는 점이다. 인현왕후의 국상에는 청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혼전에서 ‘조제(弔祭)’하였다. 청나라의 ‘조제’를 받기 위해 계상당이 아닌 읍화당(浥和堂)에 임시로 혼전을 설치한 점이 특징이다. 왕의 혼전은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왕후의 혼전이기에 그러한 것으로 추정된다.
1722년(경종 2) 8월 11일 숙종의 신주를 태묘(太廟)에 부묘하는 날에 경녕전에서 인현왕후의 신주를 옮겨 와서 함께 부묘하였다. 이때 인현왕후보다 앞서 승하한 인경왕후의 신주도 영소전에서 옮겨 와서 함께 부묘하였다. 따라서 경녕전은 인현왕후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701년 12월 9일부터 12월 25일까지는 창경궁의 문정전에, 1701년 12월 25일부터 숙종의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722년 8월 11일까지는 경덕궁의 계상당에 설치되었다.
변천
경녕전이었던 경덕궁의 전각은 고종대까지 존속되다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참고문헌
- 『인현왕후국장도감의궤(仁顯王后國葬都監儀軌)』
- 『인현왕후빈전도감의궤(仁顯王后殯殿都監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