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旗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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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족, 군대 등의 권위와 위엄 혹은 지위를 대외적으로 상징하고 표현하기 위해 만든 깃발.

개설

기장(旗章)은 근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국가의 위의(威儀)와 외교적 관례를 위해 사용하던 상징물이다. 서구 근대 국가들이 주도한 국제법에서는 타국의 기장인 국기를 상호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은 물론 외국 공관은 자국의 국기를 게양할 권리를 인정하였다. 조선도 국초부터 여러 기장이 있었다. 기장은 의장의 한 부속물이었다. 조선의 의장은 왕조국가의 군주가 위의를 갖추고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전후좌우에 두던 기치(旗幟)와 병장기를 의미했다. 이 기치가 기장이다. 기장을 비롯한 의장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대 국가에서 전쟁을 앞두고 각종 군기를 동원할 때 지휘자의 위치와 병장기의 위용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근대 이전의 조선에서는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기장이 효과적인 전달 매체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나아가 수세기에 걸쳐 사용된 기장은 왕을 비롯하여 사용 구성원 전체가 친숙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그 정치적 상징성이 개념적으로도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근대기 이전 조선왕조의 기장은 근대 국민국가에 상응하는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 왕과 왕실에 국한한 것이 많았다.

고종은 개항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이 근대화를 진행하며 사용한 여러 문물제도 중에서 기장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고 새롭게 기장 제도를 개편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수백 년간 이어졌던 중국의 정치, 문화권을 이탈하여 서구 중심의 근대적 국제 질서에 본격적으로 편입함으로써 근대 국가의 면모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이때 대외적으로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선양하고 상징할 수 있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더욱이 고종은 1897년(고종 34) 10월에 대한제국 성립을 선포하고 개혁을 단행하였기에 새로운 기장의 도입은 시대적 과제였다. 고종은 중앙의 내각부터 친위대나 시위대 등 대한제국의 위용을 국내외로 천명할 수 있는 제도의 변혁을 진행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를 대표하며 국제 외교의 의례상 필요한 어기(御旗), 국가(國歌), 국기(國旗) 등의 제도적 정비가 시도되었다. 1902년(고종 39) 8월에 고종은 어기와 친왕기(親王旗) 제작을 위한 기장조성소(旗章造成所)를 설치하였다. 이후 1910년(순종 3)까지 대한제국의 다양한 기장을 제작하고 이용하였다.

내용 및 특징

1884년(고종 21) 10월 1일 우정총국(郵征總局)에서 우정 사무를 개시하였는데 우정국 건물과 우편물을 운반할 때에 사용할 기장의 도안을 작성해 보고하였다(『고종실록』 21년 9월 30일). 정부 외에 민간에서도 국가의 기장을 만들어 사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1891년(고종 28) 이종하(李鍾夏)가 일본의 기선 태호환(太湖丸)을 65‚000원에 구매하기로 계약을 맺고 통리아문에 허락과 빙표(憑票)의 발급을 요청하였다. 이때 통리아문은 만약 이종하가 태호환을 구매했다면 즉시 그 배에 조선의 기장을 달아 식별할 것을 항만의 관리들에게 지시하였다. 1892년(고종 29)에는 전환국(轉運局)이 급히 사용하던 화륜선인 창룡선(蒼龍船)이 각 항구에서 진출할 때에는 기장을 달아서 조선국의 배임을 명확히 하도록 세관과 전운서(轉運署)에 지시하였다.기장의 도입은 대한제국 이전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국가 차원에서 기장을 제작하고 운영한 것은 1902년(고종 39) 기장조성소를 설치한 이후부터이다. 당시 고종은 황실의 어기(御旗), 예기(睿旗), 친왕기(親王旗) 및 군기(軍旗)를 제작해야 하므로 궁내부(宮內府), 의정부(議政府), 원수부(元帥府)에서 협력하여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조성된 것이 기장조성소이다. 기장조성소를 운영하기 위한 감동대신(監董大臣)에는 의정부(議政府) 의정(議政)윤용선(尹容善), 감동당상(監董堂上)에는 원수부 총장민영환(閔泳煥), 궁내부(宮內府) 대신서리(大臣署理)에는 윤정구(尹定求)가 임명되었다(『고종실록』 39년 8월 18일). 민영환은 표훈원 총재(表勳院摠裁)를 겸임하였다. 기장조성소에서는 1년 후인 1903년(고종 40) 10월에 황제, 황후, 황태자, 황태자비, 영친왕의 기장을 만들었다(『고종실록』 40년 10월 27일). 당시에 조성된 각 기장에 소요된 비용은 어기·예기·친왕기 및 각 연대기(聯隊旗) 8개, 기병기(騎兵旗) 300개의 제작에 6,083원 96전, 기장궤자(旗章樻子) 15좌(坐)에 515원 7전이었다.

고종은 1903년(고종 40) 12월 26일 덕수궁 즉조당(卽祚堂)에서 직접 황제 기장을 받았다(『고종실록』 40년 12월 26일) 황실의 기장보다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외교적인 기장은 1년 전에 만들어졌다. 1902년(고종 39) 8월에 주청공관의 인장(印章)과 주영대사의 깃발이 만들어졌다. 동시에 군대의 새로운 기장도 조성하였고 표훈원(表勳院)에서도 기장을 조성하였다(『고종실록』 39년 8월 20일).

군대에 대한 기장도 이루어졌다. 1904년(고종 41) 10월에는 육군장졸복장제식(陸軍將卒服裝製式)을 개정하면서 기장도 지정하였다. 시종(侍從), 배종(陪從), 친왕부(親王府)의 무관(武官)은 기장을 갖추게 했다. 또한 고등부관(高等副官)과 여단(旅團) 이상 부관의 장(章)은 황색으로 하였으며, 각 부(部) 사환군(使喚軍)의 수장(袖章)은 홍색으로 했다(『고종실록』 41년 10월 13일).

기장의 조성에는 감동대신인 궁내부 특진관윤용선, 감동당상인 표훈원 총재민영환, 감동(監董)인 원수부(元帥府) 검사국원(檢査局員)이기표(李基豹), 군부(軍部) 기사(技師)오정선(吳禎善)·송경화(宋景和), 직조소 간사(織造所幹事)강준희(姜準煕)· 손병균(孫炳均)·이병제(李秉濟), 재봉소(裁縫所) 간사(幹事)정위(正尉)박승환(朴昇煥)·이면순(李冕淳), 기장기화(旗章起畫)인 전화과(電話課) 주사(主事)홍의환(洪義煥), 도화주사(圖畫主事)전수묵(全修默)·서원희(徐元煕) 등이 참여하였다.

변천

1910년(순종 3)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한국의 기장 제도는 폐지되고 일본식으로 변형되었다.

참고문헌

  • 『承政院日記』
  • 『日省錄』
  • 『海軍旗章条例』
  • 藤森大雅, 『萬國旗章圖譜』, 1852.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5 , 1971.
  • 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1-26 , 1986~1998.
  • 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1-11 , 1998~2000.
  • 권석봉, 「國旗 制定의 由來에 대한 管見」, 『역사학보』23 , 1964.
  • 김혜수, 「해방 후 통일국가수립운동과 국가상징의 제정과정―國號·國旗·國歌·國慶日 제정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75 , 1997.
  • 목수현, 「『各國旗圖』의 해제적 연구―국기로 보는 대한제국기의 세계 인식―」, 『奎章閣』42 , 2013.
  • 이태진, 「대한제국의 皇帝政과 「民國」 정치이념―國旗의 제작·보급을 중심으로―」, 『한국문화』22 , 1998.
  • 장학근, 「太極旗 由來와 海軍」, 『해사논문집』33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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